정원교의 중인환시 (52)

삼별초의 난
뉴스일자: 2019년08월05일 00시00분

삼별초(三別抄)라는 조직은 원래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 세력을 잡고 있던 최우의 집에 도둑이 들자 매일 밤 그의 집 주위를 야간 순찰시키던 야별초(夜別抄)가 시초이다.

최씨집단은 그 후에도 도둑이 전국적으로 극성을 부리게 되자 야별초의 기구를 확대하여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를 두게 하여 순찰범위를 넓혀 갔고 이후 몽골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이 돌아와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게 되자 이때 좌별초, 우별초와 신의군까지 합쳐 삼별초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후 이 삼별초는 최씨의 군부독재를 유지시키는 역할도 해왔다.
 
이들 모두는 최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조직정도였으나 질서유지를 위한 경찰이나 외적과의 전투병력으로도 활용되었으니 군대조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1232년 몽골군의 침입이 있자 고종은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때 몽골군과 맞서 싸운 조직이 삼별초와 관군이다.
 
나라를 위해 죽기살기로 싸우던 삼별초가 오히려 고려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이렇다.
 
몽골군 침입이 있은지 37년이 흐른 1259년 태자 전()이 고종을 대신해서 몽골에 입조(入朝)한 것을 계기로 고려조정에서는 개성으로 다시 환도하는 것을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태자(후에 원종이 됨) ()을 중심으로한 문신들은 환도할 것을 주장하였고 최우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은 환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친몽과 반몽의 대립이었다.
무사들이 환도를 반대했던 이유는 <만일 개성으로 환도한다면 이는 몽골에 완전 항복하는 것이다>는 것이 이유였다.
 
무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환도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자 당시 삼별초의 지휘관으로 있던 배중손이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추대하며 조정이 환도할 수 없도록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삼별초가 몽골군의 침략이 있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워왔으면서도 조정과 몽고간의 강화하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그들의 주장이 끝내 관철되지 않자 울분을 참지 못했던 것이다.
 
강화도에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몽고, 민족자주독립을 내세워 민심을 얻으려 했으나 오히려 주민들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지도자 배중손은 배를 모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재물과 가산을 모두 싣고 진도로 향했다.
 
이때 모아진 배가 천여 척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를 따르는 자들도 얼마나 많았는지를 가름 할 수 있다.
지금도 강화도를 가보면 천여 척의 배를 부두에 모아 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진도로 진지를 이동시킨 삼별초는 강화도에 있을 때 보다 더 강력한 기지를 건설하고 남해와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해전에 미숙한 몽골군을 제압할 계획이었다.
몽골에는 바다가 없으니 해전에 능숙할 수 없을 것이며 징기스칸이 유럽까지 침공할 때도 오로지 육지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에서다.
 
삼별초군은 진도를 거점으로 거제, 탐라(제주도) 30여 곳의 해안지역에 진지를 두고 해상왕국을 이룰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런 사조직이 커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1270년 조정에서는 김방역이라는 사람을 전라초토사로 임명하고 몽골의 원수 아해(阿海)가 이끌고 온 군사와 연합하여 삼별초 조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로 밀고 밀리는 싸움이었지만 김방역과 아해의 연합군은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듬해인1271년 몽골에서는 지휘관이었던 아해를 홍다구(洪茶丘)로 교체시키고 고려조정에서도 김방역 이외에 흔도(炘都)라는 인물을 추가투입하여 삼별초의 근거지인 진도를 총공격해 들어 갔다.
 
삼별초군도 처음에는 고려-몽골 연합군에 맞서 잘 싸웠으나 열세부족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왕으로 옹립되었던 승화후 온(承化侯 溫)이 홍다구와 맞서 싸우다 죽고 지도자였던 배중손은 연합군들 속에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삼별초는 이 전투에서 본거지 전라 진도를 포기하고 탐라(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긴 후, 해적질을 하면서 관군과 몽골군에 피해를 주기 시작하면서 전라-경상은 물론이고 멀리 경기 인천까지 올라가 국가에 바쳐지는 쌀(세미)을 탈취하는가 하면 군함을 불태워 버리는 작전 등으로 고려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이처럼 삼별초는 최후까지 항전을 했으나 한번 무너진 대세는 만회할 수 없었다. 드디어 1273년 김방경, 혼도의 관군과 홍다구 몽골군 등 1만명이 탐라를 공격해 들어오니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졌고 삼별초의 난은 약 3년만에 완전 진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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