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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04월01일 00시00분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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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사의 마지막 여름
류 현옥
태양은 눈부시고 노란 조롱꽃이 만발한 화창한 4, 그날은 독일의 큰 명절, 예수님이 승천하심을 기리는 부활절이었다.
 
요한재단의 넓은 정원의 소로를 자전거를 타고 근무처로 향했다. 시집을 가고 자식을 키우는 큰 딸이 했던 말이 아프게 떠올랐다. “엄마는 명절날이면 우리를 혼자 두고 근무를 갔어!” 실제로 부활절만이 아니고 크리스마스 때도 근무를 했다.
 
베를린의 명절은 나의 어린 날 추억과 무관한 서구문화권의 명절이었고 그것을 아는 동료들은 이방인이 근무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게도 독일 태생의 두 딸이 명절임에도 엄마 없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근무를 감수했다. 기독교 국가인 독일, 남을 사랑하라는 기독교 사랑의 논리도 나와 무관했다. 독일인 동료들은 가족들과 집에서 명절을 함께 보내기 위해 자기들 휴가만 생각했고 이민자의 심정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탓만은 아닐 수도 있다.
 
내게도 독일인으로 성장하는 두 아이에게 명절을 헤아려 줄 마음의 여유가 없고, 나의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의 생명줄인 직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했을 뿐이다. 두 아이와 나의 생계를 위해 근무보다 더한 일도 했어야 할 수도 있었고 남의 나라에 와서 두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있다는 감사와 안도만으로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감지덕지하는 형편으로는 아이들을 방치하는 아픈 마음을 감수해야 했다.
 
병원 정원에는 부활절 꽃바구니를 든 병문안 방문객들이 가득했다. 나는 밝은 얼굴로 색동옷을 입고 세배를 갔던 어린 날을 연상했다. 그들의 세계 속에서 같이 살고 있음에도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인 듯 느껴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지난날의 기억 속 과거로 회귀해 본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나라는 존재는 물위에 떠도는 기름방울처럼 흡수되지 않는 이물질이었다.
 
그들에게는 병상의 친족을 맡기는 이방인 노동자로 보였을 것이고 함께 명절을 즐길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설령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나의 소외감은 유독 명절이면 그들과 나와의 거리가 한층 벌어지는 느낌을 실감하였고 고향을 떠난 자의 외로움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봄 소풍을 나온 사람들처럼 그들이 가득한 병원의 정원을 바라보며 고향동네의 뒷산을 가득 덮는 진홍색 진달래꽃을 생각했다. 병동 복도에 차린 상에 가득 차린 계란 노른자로 만든 술이든 초콜릿이나 달걀 같은 부활절 상차림 역시 나와는 관계없는 명절음식이었다.
 
부활절에 근무를 가니 지난밤에 심장마비로 앰뷸런스에 실려 온 환자가 누워 있었다. 환자는 명절 스트레스가 있을 때마다 겪는 증상이라며 부활절이 지나가면 나을 거라고 말했다고 밤 근무 동료가 인계를 했다. 칠순을 넘긴 남자였다. 그는 이미 다른 두 명의 환자와 한 방에 누운 상황이 스트레스를 증폭시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벽 쪽으로 돌아누워서 내가 묻는 말에 힘겹게 대답했다.
 
몇 가지 물어볼게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다 물었는데 또 물어볼게 뭐가 있습니까?”
담배를 얼마 정도 피우세요?”
지난 오십 년 동안 담배를 피웠고 내 심장병의 원인인 것도 압니다. 하루에 몇 개를 피우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묻습니까?”
여기 챠트의 질문 사항으로 나와 있으니 어쩌나요.”
 
환자는 한숨을 쉬며 바로 누웠다. 들어 보이는 챠트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본 후, 하루에 한 갑 이상을 피운다고 답했다. 술은 주로 포도주로 한 병을 마신다고. 나는 병동이 상당히 크지만 두 개 뿐인 독방이 다 차버려서 3인실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부활절 방문객으로 북적거릴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했다. 물론 숨이 가쁘고 가슴의 통증이 왼쪽 어깨 쪽으로 기어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는데 그 증상은 종종 경험하는 것으로 지나간다고 했다.
 
심신의 치료가 최대한으로 가능한 상황일 줄로 알고 왔는데 3명이 한방에 누웠으니 장바닥같이 부산스럽다고 비유했다. 부활절이 끝나면 퇴원하게 될 독방환자를 설득시켜 이 환자와 자리를 바꾸어 주었다. 이 조처가 인연의 계기가 될 줄은 예감하지 못했고, 다만 예민한 환자의 회복을 위해 결정을 했을 뿐이다.
 
마침 명절에 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부활절 인사를 한다고 출근한 병원 부원장이 신환자를 검진했다. 심장전문병원으로 보내야 할 환자라고 했다. 환자는 명절 스트레스로 흥분하면 반드시 심장이 아프기 시작하고 숨이 가빠진다며 부활절이 지나면 낫게 될 거라고 했다며 웃었다. 내게 독방으로 옮겨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했다. 심사숙고하는 표정을 지으며 명절이면 일이 많아지는 여자들보다 남자들에게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주목할 만한 현상이기는 한데, 전혀 이상 없는 심장이 부활절의 소란 때문에 심장환자의 특징적인 증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부연했다.
 
부활절과 연결된 트라우마가 있는지 물어본 부원장에게 환자는 16살 소년병으로 히틀러의 전쟁예비군으로 야전 훈련소에서 부활절을 지낸 기억 때문이라고 했단다.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부활절에 재현하였다지만 당신의 심장혈관은 위험수위를 넘어 있다고 말해주었다고 했다.
 
환자는 며칠 후 심장 전문병원으로 이송되었고, 70% 이상이 막힌 심혈관 수술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햇볕의 강도가 더해가고 있는 초여름의 어느 날 그 환자가 병동을 방문했다. 성공적인 수술 후에 휴양기간도 끝나 재생한 느낌이란다. 퇴원할 때 받은 서류가 든 큰 봉투를 부원장에게 드리려고 왔단다. 베이지색 플란넬 양복에 올리브 색 넥타이를 매고 온 그는 환자로 누워 있을 때 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이미 노인 심장병환자라고 스스로 자책했었는데 대학병원에서 심장병 전문 심리학자로부터 정신치료까지 받아 심신이 동시에 회복되었단다.
 
나에게 특별히 사례를 해야 한다며 식사를 초대했다. 브란덴부르크의 작은 동네에 있는 유명한 생선 전문점으로 갔다. 폴란드에서 흘러와 함부르크로 향하는 오다강변의 동네로 베를린 분단 시에는 갈 수 없었던 곳이다. 간판이 이색적인 개구리와 물고기(Frosch und Fisch)’라는 레스토랑이다. 잉어가 놀고 있는 작은 호수를 둘러싸고 식탁들이 놓여 있고 대나무가 담긴 큰 화분들로 칸막이를 쳐서 아늑한 분위기를 만든 이색적인 분위기였다. 통일 전에는 허물어져가던 어부의 초라한 집을 서베를린에서 온 부자가 사들여서 생선 요릿집으로 만들어 대도시 베를린의 신문광고를 통해 알려진 곳이다.
 
그는 평생에 잊을 수 없다는 추억이라며 간호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제받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16살 고등학생으로 히틀러 예비군으로 징용되던 날, 그의 인생에서 첫 파국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사춘기 과정을 뛰어 넘어 그날로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밀려들어갔다. 말안장을 만드는 아버지와 여비서로 일하는 어머니의 귀한 외동아들로 경제적 어려움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 문학을 전공하여 시인이 되어 세상을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나치정부는 전쟁에 이긴다는 선전을 하며 온 국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사전 예고도 없이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을 트럭에 실었다. ‘히틀러 유겐트(나치소년단)’ 단원으로 예비군이 되었다. 집에 가서 부모와 작별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운동장에서 바로 군용버스에 실려 갔고 부모들은 편지로 통보를 받았다. 거의 일 년 간 훈련소에서 군사 훈련을 하는 동안에 심한 설사병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고 나차루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어 구사일생으로 회복했다. 호전되자 야전병원 마당을 쓰는 일을 맡았다. 언젠가는 다시 훈련소에 가게 될 것을 알기에 우울한 얼굴로 하고 있는 것을 본 한 간호사가 다가왔다.
 
네가 다시 전쟁터로 가게 될까 겁내고 있지?”
, 거기에 가기 싫어요.”
설사도 멎었고 열도 내렸으니 다시 너의 동료들이 있는 야전 숙소로 가야 될 것 같은데 ...”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여기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눈을 감고 당시의 순간을 눈앞에 그려지듯이 말했다. 덕택에 그곳에 머물면서 마당 쓰는 일로 소일하는 동안 종전을 맞았다.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가 된 땅을 걸어서 집으로 갔다. 거의 열흘이 걸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울면서 벗긴 옷은 땟물로 땀으로 뻣뻣해져서 마치 갑옷 같았다고 기억한다. 훗날 생명의 인연인 그 간호사를 찾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얼굴인데 나를 보자 다시 그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나는 같은 해 장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방을 얻어 이사를 나갔고, 고국에서는 지병으로 입원하고 계셨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했다.
 
장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요? 축하할 경사입니다. 당신 딸 이야기를 내가 검토하여 신문에 낸 것 같은데요.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겠지요?”
우연하게도 그는 큰 딸의 기사를 대서특필했던 신문사의 편집국장이었다.
졸업생 중에서 제일 성적이 좋아 졸업생 대표 연설을 했습니다.”
아 그랬군요. 우리 독일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을 온 집안의 큰 경사로 잔치를 하지요. 제가 작은 잔치를 해드려야겠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다 세상에 자식보다 귀한 것이 없느니라.” 아직 살아계셔서 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고 같이 기뻐했어야 되는데, 생면부지의 환자분이 축하 잔치를 해주겠다니.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원했던 대로 신문기자가 되었다. 지난 20년간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편집국장까지 승진하였고 베를린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도 몸도 중환자였다. 젊었을 때는 하루에 12시간을 일하며 과거를 잊을 수 있었다. 하나 뿐인 아들이 결혼하여 손자를 셋이나 보고나니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인생을 재인식하는 시기도 있었다.
 
퇴직 후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지만 그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떠나지 않는 고교시절의 상처가 저녁마다 찾아와 불면의 밤을 새운다고 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천막 속 침대에 누워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린 날의 부활절을 생각하며 울던 생각을 하게 되는 데, 이젠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우리는 두 번을 더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통째로 버터에 구워낸 잉어고기에 따라 나온 샐러드는 식당 뒤 텃밭에서 키웠다는 상치에 올리브기름에 마늘을 다져넣고 레몬주스로 양념을 한 일류식사였다. 검푸르게 우거져 가는 강가의 숲을 바라보며 한 여름날을 보냈다. 그가 갑자기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내 나이 74세인데 ...” 앞으로 십년은 더 살다 죽고 싶은데 체력이 허용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마지막 여름을 예감한지도 모른다. 당뇨병에 심장병이 겹쳤는데 제일 문제는 술과 담배가 문제라는 것도 알지만 잠시 더 살기위해서 당장 술 담배를 끊고 더 괴롭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대학병원에서 퇴원할 때 주치의가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말을 전했다 젊음을 조국재건을 위해 희생한 세대의 분들에게 부탁하는 의사의 말로, 이제 세상이 평화스러워졌는데 풍성해진 물질과 자유의 세상에서 조금 더 건강을 유지하며 사시다 가셔야 되지 않겠느냐고. 근래 들어 한층 더 생명의 은인, 야전병원의 그 간호사를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서 알 수 없는 공통적인 운명을 느낀다고 했다.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가족과 친지가 없는 외국에서 힘든 일을 하는 나를 보면서 찾을 길 없는 나차루스 간호사에게 갚지 못한 은혜를 대신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89세의 노모가 노인요양원에서 아직 살아계신데 자신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해 겨울 그는 후두암 진단을 받고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목소리를 잃었다. 남은 삶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오래 미루어온 자신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주 마음먹은 일인데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나를 만나 속을 털어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이미 고인이 되었을 생명의 은인의 명복을 빌며 마음을 정리할 수가 있기에 남은 체력을 다 모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뒤이어 그는 비약적인 정신력이 생겼다는 메일이 왔다. 전력을 다해 열정적으로 쓰기 시작한지 3개월 만에 남기고 싶은 말은 다 기록했다고 연락을 한 후 다시 입원을 했다.
 
후두절개 이후로 계속 끼고 다녔던 도관을 통한 출혈을 막을 수 없었고 다시 수술하는 것을 거절하여 마취 상태를 거쳐서 별나라로 떠났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던 아들이 찾아왔고, 세 손자를 위해 썼다는 아버지의 전기를 아들이 받아서 저서 발간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다음해 여름 그의 아들 초대로 다시 호수가 레스토랑에 앉았다. 아버지의 자서전을 선물로 드리면서 잉어요리를 접대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화분에 심어 칸막이를 했던 대나무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늦가을에 화분을 보호막을 싸주지 않아 뿌리들이 얼어 죽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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