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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03월11일 00시00분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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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발드마
류 현옥
그와 나는 갑장이다. 옛날 유고슬라비아에서 흘러들어와 동독에 정착한 노동이민가족 후손이다. 노동복 생산 공장에서 미싱일을 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동독의 공산주의 시스템 아래서 고등학교 과정을 허락받지 못했다. 직업학교에서 요리사 자격증을 받고 선박 요리사로 일하는 중에 용케 배에서 탈출하여 서베를린으로 왔다.
 
그는 크로아친어를 하는 어머니 덕분에 발칸어를 유창하게 한다. 언어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여러 유럽어를 하는 것 외에도 한국어같이 어려운 말도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써먹는다. 나보다 6개월을 먼저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어디서 얻어 들었는지 자기를 오빠라고 부르라며 나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한국에서 온 여동생이라고 소개한다.
 
언젠가 카페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이 형제가 아닌 남자를 오빠라고 하면 애인으로 오해받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했을 때는 우리는 정신적인 애인이야!”라며 능청을 떨었다. 그는 요리사로 일하면서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의과대학에 들어가 천신만고 끝에 의사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살았다. 국제도시 베를린에서 의사로 일하는 동안 한국인들과는 친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의 온갖 것을 좋아하고 한국 언어에 대한 재치도 놀라워 더욱 친하게 되었다. 나와 만날 때는 스스로 담은 김치를 맛보라며 가져온다. 시금치나물, 녹두나물과 지짐 등을 반찬으로 한 불고기파티도 자주 연다. 그와 15년을 호스피스에서 동료로 일하는 동안 많은 인간의 죽음을 같이 지켜왔기에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죽음의 순간을 체험한 사람들이기에 이제 남은 우리의 삶을 잘 살아야 해! 인생의 전무가 의무라고 하지만 자신의 생에 대한 의무도 있거든. 우리는 그동안 우리스스로에게 너무 등한시했어! 스스로에 대한 의무를 지켜야할 단계에 왔어!”
그래서... 어떻게 의무를 지키며 살라는 거지?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절실하게 삶에 집중 할 수야 없지.”
우리는 남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을 배웠어. 이제부터는 죽어가는 다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동행하던 열정으로 내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정력을 다하는 거야. 우리의 하루하루에 열중하자는 거지!”
 
은퇴 전 2년을 일찍 정년에 들어간 그는 우선 원수 같은 자동차와 핸드폰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했다. 자기집중의 생활로 들어가는 첫 단계라고 했다. 걸려오는 전화에 자신을 양도해야 했다는 호스피스 홈케어 의사의 역할에서 우선 빠져 나와야 되겠다고 했다. 전화로 부르는 환자를 방문하기 위해 차를 몰고 온 베를린시를 내 집처럼 헤치고 다녔으니 우선 이 두 기계로부터 해방하는 것으로 은퇴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노동자들이 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 홈케어 의사의 일과라는 것이 환자가 부르면 가야하기에 직업에 구속된 몸이라고 말해온 터다.
 
정년퇴직자가 스스로 길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이틀에 한 번씩 수신기에 입력된 목소리를 확인하고 답변 전화를 함으로써 이제는 자신이 결정하여 대화도 하고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을 시작했다. 일 년에 7개월을 나그네가 되어 머물면서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살아있음을 의식하는 스스로 만든 여행대학 과정에 입문했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만난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곳곳에 친구를 만들어 그들을 방문 한다 ; 이집트, 터키, 이태리, 파리, 북경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베를린에 오면 자유롭게 지내고 가라고 오피스텔을 마련했다. 동료이자 절친, 필리핀 의사는, “슈테판은 나의 형님이자 친구로 한마디로 정신적 근친이야.” 말한다. 같은 정년퇴직자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산책을 한다. 그는 자주 여행하는 슈테판에게 불만이 대단했지만 언젠가는 정력이 떨어지고 여로에 지치면 베를린의 친구를 기억할 것이라고 자위했다.
나와 스테판의 인연은 단순히 같은 직장에서 일한 동료로써 시작된 것만이 아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이었던 호스피스의 공동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느 가을 날 환자의 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창가에 붙어 서서 바깥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던 환자가 말했다.
 
저렇게 많은 낙엽들 저렇게 수북하게 쌓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내년이면 또다시 새 잎사귀들이 저 고목을 장식하여 봄과 여름을 지내고 가을이면 아래로 떨어져서 나무 밑을 가득 덮을 것이다. 잊혀져갈 살아있는 모든 것들. 나와 같은 시기에 이곳을 찾아와 누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것들.
 
저 낙엽들처럼 세상에서 사라져 갈 것이고 호스피스 침대 위는 새로운 시체를 위해 간호사들은 지치지 않고 침상준비를 할 것을 .....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죽음이 나를 데리려오기 전에 한 발짝 먼저 앞서서 미리 떠날걸 그랬지! 결국 마지막까지 어리석게 바보로 살다가는 것이 안타까워.”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준비도 연습도 할 수 없는 죽음의 과정을 앞에 두고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는 억울하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다. 살기위해서 노력을 했을 뿐이고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착취했을 뿐인데 부당하게도 대가는 일찍 다가온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환자보다 오히려 간호사와 홈케어 의사들의 심정을 휘젓고 인생의 부당함을 전달하고 의술의 한계점을 인식시키는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사례도 있다.
 
어린 세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난 젊은 여인의 마지막 길이었다. 발드마와 나는 그녀의 죽음을 동행한 일로 우정을 두텁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의사가 된 터키 2세였다. 부모님의 고향 알라토니아에서 자란 6촌과 중매결혼을 한 후 남편을 베를린으로 데리고 왔다. 남편은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집에서 아이들을 키웠고 그녀는 의사로 일했다.
 
그녀의 불행은 첫아이가 정신지체아로 태어난 것과 그 원인이 근친상간 때문이라는 추측에서 시작되었다. 둘째와 셋째아이는 아직 정신 성장 과정이 분명하지 않은 시기에 암진단을 받아 투병생활로 이어졌다. 세 아이, 남편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을 대동하고 호스피스로 이송돼 왔을 때는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눈만 감으면 다음 단계로 처리될 환자였다.
 
복수가 차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침대 위로 옮기는 일부터가 그랬다. 어디에 손을 댈지 몰라 여러 명의 손이 필요하다며 어물거리고 있는 데, 남편이 혼자서 아내를 안아 옮겼다. 굵은 바늘을 꽂아 복수를 뽑아내자, 숨을 쉬는 게 나아졌다고 말한 후 바로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거의 이틀을 자고난 그녀는 준비해온 노트에 세 아들에게 남기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라기보다는 죽음과 삶의 분계 점에서 신에게 보내는 외침으로 극적인 유언 같은 기도의 글이다.
 
나의 귀한 아들들아! 오랫동안 나는 너희들을 두고 죽어갈 수가 없다고 한 생각을 버려야 할 단계가 왔어.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겠지만 훗날 성인이 되어 나의 글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투쟁했기에 지금껏 살 수가 있었지. 천사 같은 너희들 아버지가 나를 하루라도 더 살게 해주었단다. 이제는 오직 알라신의 뜻대로 나의 남은 생을 너희들에게 넘겨주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
 
그녀는 세 아이의 분만 과정을 서두로 일일이 세 명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서 나름대로의 편지를 썼다. 기억나는 대로 썼다. 세 아들은 모두 분만과정부터 다르게 태어났고 처음부터 그 개성이 남달랐다고 썼다. 글을 쓰다가 잠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와 펜을 주워 다시 이불위에 올려주고 다시 쓸 수 있게 온 직원들이 배려했다. 그녀와 나이가 같은 동료 하나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린아이를 두고 죽어야 하는 젊은 어머니를 간호할 수가 없다고 했다. 발드마는 자녀가 없었지만 세 아이를 데리고 방문을 오는 그녀의 남편과 자주 이야기 했다.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기에 들어주기만 한다고 했다.
 
발드마가 금요일 저녁에 필하모니 에 간다고 며칠 전부터 누차 말했고 그 금요일에 38 살의 젊은 여의사는 눈을 감았다. 나는 그날 오후 근무를 했다. 발드마의 걱정은 두 시간 을 콘서트홀에 앉아 있을 동안에 환자로부터 전화를 받을 수가 없는 게 문제였다. 상태를 봐서 이해할 수 있는 환자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할 수가 있고 동료에게 부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간을 다투는 죽음을 앞둔 환자와 그 가족에게는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순간의 환자에게는 두 시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오전 근무를 한 동료의 인계가 드라마틱했다. 이미 의사 발드마는 오전중에 두 번이나 다녀갔기에 걱정하는 환자가 저녁에 눈을 감는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고 강조 했다. 그동안 환자의 거부로 복수를 제거하지 않았기에 터질 것같이 팽창한 복부 때문에 호흡곤란이 시시각각으로 심해지고 있어 발드마는 몇 번이나 복수 처치를 권유했다고 한다. 환자는 복수를 빼고 수면에 빠지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이기에 복수 문제는 몇 분간의 생명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줄이는 것이기에 거절한다고 했다.
 
환자들의 저녁 식사준비로 바쁜데 발드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음악회에 가는 길에 들려서 환자 상태를 한 번 더 보겠다고 했다. 30분쯤 일찍 출발하여 갈 테니 함께 환자 방에 들어 갈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방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근무실로 오는 복도 중간에 있었다. 의사는 근무실로 오면서 그 방을 들렸는데 복수 때문에 호흡곤란이 극도에 도달 했다고 했다. 임시처방을 성급하게 내렸다. 내가 급하게 주사 준비를 하여서 기다리는 서두는 그의 뒤를 따랐다. 흰 와이셔츠에 프란넬 양복 정장의 모습으로 복도를 걷는 그의 뒤를 따르는 나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이 덮쳤다 .
 
언제나 빛바랜 청바지에 낡은 베이지색 샤스를 입고 운동화 차림으로 온갖 약이든 묵직한 검은 왕진가방을 들고 급하게 근무실로 들어오는 즉시 싱크대 앞에 서서 손을 씻으며, “지난밤은 모두 잘 지냈어요?”로 시작하는 발드마가 각오를 한 듯 여유 있게 걷는 발걸음에 예감이 담겨 있었다. 먼저 문 앞에 선 그가 돌아서서 나를 보며 한눈을 찡긋하고 노크를 하려는 순간에 문 위에 달린 램프에 빨간 불이 커졌다.
 
우리는 동시에 그 불을 쳐다보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오는 의사를 본 남편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다가왔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침대에 는 세 명의 아이가 엄마를 안고 울고 있었다. 남편은 발드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체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오랜만에 필하모니에 간다고 정장으로 입은 발드마의 흰 와이샤쓰가 눈물로 적셔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콧등이 시큰한 걸 참으며 그를 보니 그 역시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한 것을 보았고, 순간 참았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문 앞의 붉은 램프는 꺼지지 않은 채였고 간호실 부저도 그치지 않고 일정 간격으로 들리는 신호음을 냈다. 달려온 동료가 우리를 데리고 나왔다. 당분간 가족들끼리 있게 하고 사후 서류 준비를 하여 음악회에 늦지 않게 가도록 서둘렀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임에도 우리는 자주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회상에 잠긴다.
그날의 우리는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어! 우리 셋은 태어난 곳 에서 죽지 못할 친구들이기에 먼저 떠나는 그녀 앞에 서 울었지 ! 너는 간호사 나는 의사라는 것을 잊은 체 울었어 !”
 
이 말은 하는 발드마의 두 눈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두 권의 시집을 남겼다. 여기저기 써두었던 시 구절을 모아서 시집을 만들었다며 남편이 세 아이를 데리고 호스피스를 찾아왔다. 호스피스 직원들을 위해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는 대량의 터키 피자와 함께 가져온 시집을 받았다. 아내가 죽은 방 앞에서 세 아이와 함께 알라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그가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부인이 죽은지 불과 일 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사십 안쪽인 그는 반백의 머리에 허리는 굽어졌고 수심에 찬 얼굴에는 주름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재혼을 해야 하지만 독일에 온 후 직업을 갖지 않았기에 새 부인과 세 아이를 부양할 수가 없다고 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는 그는 정신지체자인 큰아들을 자기처럼 챙겨줄 여자가 없다고 했다.
 
그동안 발드마가 몇 번 찾아가 하소연을 들어주고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만 어느 누구도 소매걷이로 달려갈 수는 없었다. 세 아이 앞으로 나오는 양육비와 독일국가가 주는 아내 잃은 남자 앞으로 연금으로 먹고 살수는 있지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사정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이야기니 큰아이는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세 아이와 홀아비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며 옛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다시 옛날처럼 살아 있는 자로서의 의무로 동시대를 사는 이웃에 대한 의무 보호를 받고 사는 국가기관에 대한 의무 외에 자신을 아끼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변명으로 위로했다. 언제부턴가 정년퇴직한 의사는 말한다.
 
산자로써의 권리는 스스로가 챙겨야 한다구!”
 
111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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