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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01월28일 00시00분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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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3)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8회에 걸쳐 특집 면을 준비한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는 먼저 3.1운동의 전반을 살펴보며,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며, 3.1운동의 결실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3·1 운동 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3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3·1 혁명 또는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황제의 장례식)19193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3·1 운동은 현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II. 3.1운동의 전개
 
(1) 31운동의 준비과정
1919120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에게 찾아가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손병희는 허락하였고, 그 자리에서 세 가지 독립운동의 원칙을 결정하였다.
첫째, 독립운동을 대중화하여야 할 것.
둘째,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야 할 것.
셋째, 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
그 후 구체적인 사항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에게 위임되어 이들은 기독교, 불교, 유림, 학생들과의 공동전선 결성을 위한 교섭을 담당했다. 2월 상순에 이들은 독립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윤용구, 한규직, 박영효, 윤치호 등 대한제국의 구 관료층을 만나 민족대표로의 추대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시기에 최린은 송진우를 통해 기독교 측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의 합류를 요청하였고, 원래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기독교 측 역시, 224일 부로 무조건 31운동 합류를 결정했다. 이렇게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가 공식적으로 결정되고, 운동 추진방법에 대한 세부적이 합의가 이루어졌다.
거사일은 31일 오후 2시로 하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하여 서울에서는 독립선언 당일 군중에게 배포하여 만세를 부르게 하며, 지방에는 이를 분송한다.
<독립선언서>를 각 지방에 분송할 때 서울에서의 일시 및 <독립선언서> 배포 절차를 전달하여 각 지방에서도 서울을 따르게 할 것.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기초와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담당할 것.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분송은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서 각각 담당할 것.
일본 정부와 일본 귀족원중의원의 양원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측에서 담당하여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측에서 담당하여 보낼 것.
조선민족대표로서 각 서면에 연명할 사람은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십 수 명을 선정하도록 할 것.
독립운동에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불교도도 연명에 참가시킬 것.
최린은 기독교측과 연대를 성사시킨 후, 불교측의 교섭상대를 물색하였는데 시일이 촉박하여 불교측 대표는 한용운과 백용성 두 사람만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후 유림과의 접촉도 시도했었으나 초기 민족대표의 역할을 거부했던 유림들은 소극적이었고, 촉박한 시간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학생측과의 연대는 223일에 성사되었는데, 학생세력들 역시 28운동에 큰 자극을 받아 이미 비밀리에 자체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23일 종교계 대표들과 각 학교 대표들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이로서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이 이루어졌고, 그 후론 31운동을 위한 준비에 모두 박차를 가했다.
 
(2) 31운동의 발발
191931일 오후 2시 경, 태화관에 민족대표 33인 중 29(길 선주·김 병조·유 여대·정 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간결하게 치러졌는데, 한용운이 독립선언을 알리는 식사와 선창에 이어 29인의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는 순서였고, 선언 직후 이들은 일본 경찰대에게 전원 연행되었다.
한편 같은 시각 파고다공원에는 서울의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과 민중들이 독립 식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어 약속되었던 33인의 민족대표 대신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낭독이 끝날 무렵 대한 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다. 이후 군중들은 공원 밖으로 나와 거리에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 만세시위는 고종의 인산 참배를 위해 전국에서 상경한 군중이 가세하여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종로거리에서 시작된 만세시위행진은 해질 무렵에는 교외로 번져나가, 오후 8시경 마포 전차 종점 부근에서 대대적인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연희 전문학교 부근에서는 밤 11시까지도 해산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수만의 군중이 날이 저물도록 시위하였으나 31일 당일, 폭동사례는 1건도 발생되지 않아 비폭력의 원칙하에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일본군은 군경과 용산 주둔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시위 군중 해산을 위해 투입했고, 29명의 민족 대표를 비롯하여 중요지도자 134명이 체포되었다.
 
(3) 3.1운동의 확산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2단계(도시확산기)310일을 전후로 한 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3월 중순 이후의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31일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과 평양·의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으로 일방적으로 변경하였다.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3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서영환(徐永煥)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오후 3시 한용운(韓龍雲)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에 일본 경찰에 통고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민족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230분 무렵에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서울역·정동·이화학당·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32일에는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3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고,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서울의 학생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3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평양과 광주 등의 학생들도 결사대를 조직해 이에 참여했다. 이 날의 시위는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의 지속성을 전파하여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310일 이후에는 시위가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으며, 비밀결사와 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청년과 학생들이 주도한 비밀결사는 전단과 격문 등을 제작·배포하여 투쟁열기를 높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총궐기와 결사항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은 <조선독립신문>, <노동회보>, <반도의 목탁>, <충북자유보>, <혁신공보>, <각성호외보>, <광주신문>, <강화독립회보> 30여 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조선독립신문>27호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큰 역할을 했던 청년과 학생들은 독립청원이라는 대외의존적인 태도를 지녔던 민족대표들과는 달리 민족의 주체역량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운동은 3월 중순 이후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노동자·농민·중소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다음호에서는 전국으로 번진 3.1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1108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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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redaktion@kyoposhinmun.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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