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8)
HOME 회사소개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기자회원신청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뉴스플러스 > 기고/연재
2018년08월13일 00시00분 115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8)
황만섭(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2017. 6. 5 ~ 6.11 일본, 6.11-6.19 한국)
2008년 창원 정우상가 앞에 노동자상을 세우려는 사람들과 이를 제지하는 경찰들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노동자상은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탄광노동자로 곡괭이를 든 남자와 10대 소녀상은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던 여성을 상징하며, 남자 어린이는 징용으로 부모형제와 헤어진 일제시대 때의 수난을 담았다. 3명이 등을 맞대고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노동자상의 제작은 유창환 작가가 맡았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850여 만원을 모았고, 학생들이 헌 옷과 폐 휴대폰을 수거해 기금을 보탰다. 거기에다 경남도청과 경남도 교육청이 기금을 보태고, 창원시는 터를 제공했다. 정우상가 주변상인들도 자발적으로 성금을 냈고, 안치환 가수가 축하공연까지 준비한 행사였다. 지난해 서울 용산역, 인천 부평공원, 제주항에 이어 전국 네 번째로 세워지게 되는 노동자상이다. 이렇게 자기 역사를 기억하고 챙기면서 소중히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곧 희망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만해 한용운은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했고, 한국근대불교계에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으로 개혁을 이끈 승려였다. 그리고 그는 또 문학가이기도 했다. 그가 1926년에 펴낸 시집 님의 침묵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담아낸 작품으로 시집의 표제시인 <님의 침묵>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로 유명하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구절에 희망의 씨앗을 숨겨 암울했던 그 시절사람들을 위로하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당시도, 지금도, 사람들은 눈물로 님의 침묵을 암송한다. 만해는 죽음, 흑풍, 철혈미인, 후회, 박명 등의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한학자이자 교육자이었으며, 역사가이었고 작가이기도 했던 정인보(1893-1950 납북) 선생은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만해가 있다고 자랑했고, 임꺽정을 썼던 벽초 홍명회 선생은 젊은이들이여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칭송했다.
 
그럼 여기서 벽초를 한번 살펴보자. 벽초 홍명희는 충북 괴산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홍승목은 친일파로 그 악명을 날렸고,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했다. 아버지의 자결로 인해 벽초는 일본유학을 중단해야 했다. 벽초는 1919년 괴산에서 3.1운동에 참가했고,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돌아본 후, 1927년 신간회 부회장을 맡아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벽초가 쓴 소설 임꺽정은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일제치하에 수감된 문인들 중 유일하게 옥중집필이 허용된 작가는 홍명희뿐 이었다. 그가 감옥에 갇히자, 신문연재가 중단되었고, 이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총독부 관리들조차 임꺽정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터라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옥중에서의 집필을 허락한 그들(총독부)은 원고를 받아 먼저 읽고 난 후에 조선일보에 넘겨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소설 임꺽정은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릴 정도였다. 만해 한용운은 연재기간으로 봐서 세계최장의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훗날 홍석중이 임꺽정을 마무리 지었으므로 대를 이어 창작한 셈이다.
 
원래 미완성 작품이라서, 홍명희가 그 소설을 완성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있었지만, 아버지(홍명희)'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의 생각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어서 임꺽정을 완성하지 않았다고 홍석중은 회고했다. 홍명희는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벽초 홍명희와 위당 정인보와는 사돈지간 이었고, 당시 조선의 3대 천재는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이다라는 소문이 조선8도에 파다했다.
 
다시 만해 이야기를 더 해보자. 어느 날, 만해가 파고다공원 앞을 지나다 육당 (최남선1890-1957)과 마주쳤다. 만해가 모르는 척 지나가자, “! 이 양반 나를 보고도 모르는 척 하느냐?”고 육당이 반겼다. 그러자 만해는 내가 아는 육당은 장사 지낸 지 이미 오래 되었다며 싸늘하게 반응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동지였고, 더욱이 육당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이다. 그러나 육당은 이미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 그렇게 훌륭했던 육당도 죽었구나하고 자기마음속에 장사를 지내버렸던 것이다.
 
1933년 만해는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집을 지어놓고 입적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주위에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집을 지을 것을 권유했으나,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며 끝내 동북방향으로 집을 틀어 지은 사람이다. 김동삼(1937,3)이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하다가 마포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러주기도 했다.
 
변절한 친일인사에게는 친분이 두터웠거나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교를 했다.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찾아왔지만 만나주지 않았고, 무안해진 최린이 선생의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만해는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쳤고, 그 길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는 일화가 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1896년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에서 수도를 시작했고,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불교학원 교원(1913),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1923), 불교청년회 회장(1923), 신간회 중앙집행위원(1927), 경성지회장(1927) 등을 역임했다.
 
*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뉴스스크랩하기
편집실 (redaktion@kyoposhinmun.de)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기고/연재섹션 목록으로
[기고/연재]한국상사와 개인사...
[기고/연재]김재승 한의사의 ...
[기고/연재]정원교의 중인환시...
[기고/연재] 최용준 안토니오 ...
[기고/연재]일본과 한국 방문 ...
 

이름 비밀번호
[1]
다음기사 : 김재승 한의사의 건강칼럼(53) (2018-08-13 00:00:00)
이전기사 : 정원교의 중인환시(衆人環視) (24) (2018-08-13 00:00:00)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파세연 창립 11주년 기념행사 안...
# 시청료 없는 한국방송 # 휴대...
장애인총연합회 건강교육세미나
혜민스님 쾰른행사 안내 -주최측...
건강세미나 주제: Pflegestufe -...
자동차퍽치기 당하다!?
책&삶에서 독일 소식을 전해줄 ...
한글로망 자랑스런 한글 세계화
    답변 : 한국을 한국이라 말...
독일의사들 선운사에서 한국기공...
피해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Damenmode bis 80% Duesseldorf-...
아름다운공간
CoOpera 가이드 모집공고
총신대 한국어교원양성과정과 함...
2016학년도 재외동포 국내초청교육(모국수학) 과정 수...
회사소개 개인정보보호정책 이용약관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알립니다 독자포럼 정기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