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7)
HOME 회사소개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기자회원신청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뉴스플러스 > 기고/연재
2018년08월06일 00시00분 226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7)
황만섭 (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2017. 6. 5 ~ 6.11 일본, 6.11-6.19 한국)
 
동경체류 중, 하루는 황궁(황거皇居)을 구경했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두 시간 동안 정해진 시간에 황궁 일부만 보는 단체관광으로, 먼저 실내로 안내되어 안전(보안)교육을 받아야 했고, 이동(관광) 중에도 앞뒤 옆을 지키며 60여 명의 관광객을 10여 명의 안내자가 에워싸고 걸으면서 단속했다. 마치 유치원생들의 나들이처럼 혹은 죄수들의 호송처럼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며 주의를 주어 여간 불편하고 또 불쾌하기까지 했다. 황궁구경도 특이하다고 생각이 드는 볼거리는 별로 없었고, 지독히도 더운 날씨이었다는 기억뿐이다.
도쿄의 중심가인 긴자 거리는 타카시마야 파출소가 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다행이 긴자 거리는 우리가 머무는 호텔에서 가까워서 시간만 나면 자주 긴자를 찾아 나섰다. 특히 일요일의 긴자는 차량통행을 막아 길을 가득 메운 인파가 장관이었다. 일요일 하루는 그래서 즐거웠다. 자유롭게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18시가 되니 다시 차량통행을 허락했고, 사람들은 보도위로 밀려나는 광경을 직접 보면서 체험하는 것 자체 또한 신기하고 즐거웠다. 내가 느낀 동경의 이모저모는 특별히 아름답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도시풍경이었다. 어쩌면 서울의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답고 편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왕에 시작한 우리와 일본 사이에 있었던 역사이니까 현대사였던 일제36년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옛날에 그들에게 당했던 임진왜란에 관해서도 이번 기회에 한번 짚어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를 한국말로 한때 풍신수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든 인명은 그 나라 말로 불러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일본어 표기법에 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러주어야 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으로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그들이 도망가면서 전쟁도 끝이 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래 생긴 것이 엉망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늘 원숭이라고 놀려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그런 가정형편 관계로 그는 일찍 가출해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타고난 재치와 뛰어난 이재감각을 가졌던 그는 자주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1552년경엔 오다 노부나가의 잔심부름꾼으로 일을 하기도 했던 히데요시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는 인생을 살았고, 마침내 일본을 통일하는 영웅의 지위에까지 올라간다.
 
통일 후엔 무사들의 욕망과 불만을 잠재우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장수들을 늘 전쟁터로 내보냈다. 그 와중에서 일으킨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우리에겐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이었지만, 일본에서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영웅으로 추대 받는다.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전쟁이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아 고시니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파죽지세로 부산, 밀양, 대구, 상주, 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렀고, 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 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서울)으로 쳐들어왔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는 동안에, 탄금대에서 신립의 군대에 대패했다. 그 뒤 신립의 패전으로 제3군도 한양에 입성했고, 선조 왕과 조정의 백관들은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백성들은 도망가는 왕이 임진강을 건널 수 없는 것을 보고, 부랴부랴 자기집 대문을 뜯어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렇게 착한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거길 널문리라고 불렀다. 6.25동란 이후 정전협정 때 널문리를 중국대표가 찾아오기 쉽게 한문표기가 가능한 판문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의 판문점이 생겨났고, 그 판문점은 판문점선언을 낳았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하면서 이순신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선조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해전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승리로 이끈 조선의 명장이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후,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거북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조련했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옥포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대첩에서 적선을 크게 격퇴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시켰다. 1595년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으나, 전쟁에 쫓기자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켰다. 감옥에서 전쟁터로 온 충무공은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대첩을 이끌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 마지막 전투였던 11월 노량해전에서 왼쪽 가슴에 총을 맞고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 위기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 호남사람들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그가 전쟁 중에 틈틈이 기록한 <난중일기>가 유명하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1086호 17면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뉴스스크랩하기
편집실 (redaktion@kyoposhinmun.de)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기고/연재섹션 목록으로
[기고/연재]터키 보드룸(Bodru...
[기고/연재]상냥한 정여사가 ...
[기고/연재]내가 운전면허를 ...
[기고/연재]정원교의 중인환시...
[기고/연재]상냥한 정여사가 ...
 

이름 비밀번호
[1]
다음기사 : 최용준 안토니오 신부님의 독일과 유럽 이야기 (5) (2018-08-06 00:00:00)
이전기사 : 정원교의 중인환시(衆人環視) (23) (2018-08-06 00:00:00)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제 27회 겨자씨 모임
뒤셀도르프 소망교회 대강절 성...
사)재독한인간호협회 제26차 정...
향군창립 66주년(지회 창립 8주...
도르트문트 한글학교 40주년 학...
자동차퍽치기 당하다!?
책&삶에서 독일 소식을 전해줄 ...
한글로망 자랑스런 한글 세계화
    답변 : 한국을 한국이라 말...
독일의사들 선운사에서 한국기공...
피해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Damenmode bis 80% Duesseldorf-...
아름다운공간
CoOpera 가이드 모집공고
총신대 한국어교원양성과정과 함...
[중소기업진흥공단 SBC] 2019년도 해외민간네트워크 ...
회사소개 개인정보보호정책 이용약관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알립니다 독자포럼 정기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