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독일의 6대 가도를 가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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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07월16일 00시00분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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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6대 가도를 가다 (14)
괴테가도(Goethe Strasse) ⑧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 독일을 대표하는 6대 가도에 그의 이름이 빠질 리 없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약 600구간에 풀다, 아이제나흐, 바이마르, 예나, 라이프치히 등과 같은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는데 몇몇 도시가 괴테와 깊은 관련이 있어 괴테 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괴테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 산실인 괴테 하우스는
프랑크푸르트에 자리잡고 있다.
괴테하우스는 영국을 찾는 여행자들이 셰익스피어 생가를 가보고 싶어하듯 독일을 찾아온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명소. 괴테와 관련된 여러 유물 말고도 1700년대 독일 상류층 주택구조와 생활용품을 함께 볼 수 있는 꽤 흥미로운 곳이다.
괴테가 대학 시절을 보낸 라이프치히와 함께 바이마르도 괴테와 인연이 깊은 도시다. 괴테 생애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도시가 바이마르고, 생을 마감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괴테가도를 따라 그의 삶의 흔적이 남은 도시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라이프치히(Leipzig): 바흐와 멘델스존, 그리고 파우스트의 도시
라이프치히는 음악의 도시로 불린다.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 멘델스존이 주로 활동한 지역이고, 라이프치히에서 약 30km정도 떨어진 할레(Halle) 음악의 어머니인 헨델의 고향이며 청년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음악의 거장들의 활동과 더불어 라이프치히는 괴테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괴테는 1765년부터 1768년 병에 걸리기 전까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현재 라이프치히 중앙역 왼쪽편 길 이름이 괴테 스트라세였고 그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라이프치히 대학이 나온다.
라이프치히는 괴테가 <파우스트> 집필을 위한 첫 구상을 했던 곳이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이 당대의 희곡에 등장하는 술집도 만나볼 수 있다. 라이프치히는 국제적 견본시답게 아케이드가 유난히 많은데, Mädler Passage 지하에 자리를 잡고있는 Auerbachs Keller도 그중의 하나다.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스>에 나오며 실제 조이스가 즐겨 찾았던 더블린의 Davy Byrnes pub이 소설 출간 이후 매출이 크게 오른 것처럼, 이곳 역시 <파우스트>후광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서는 파우스트 등장인물들의 조각이 사람들의 시선을 기다린다. 발을 만지며 소원을 빌면 틀림없이 이뤄진다고 해서 유독 발 부분만 색깔이 누렇게 변해 있다. 방문객들은 생생한 조각상을 들여다보며 현세적 욕망과 쾌락을 경계하라는 <파우스트>의 메시지를 다시금 떠올리곤 한다.
라이프치히는 중세부터 교통의 요지로 유명했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드레스덴, 베를린, 하노버, 도르트문트가 바둑집처럼 둘러싸여 있어 사통팔달의 입지를 자랑했다. 폴란드와 체코, 오스트리아로 이동하기도 편하다. 그런 연유로 이 도시는 이미 15세기부터 유럽 각국의 거상이 참여하는 무역박람회로 이름을 떨쳤다.
그 활발한 교류의 물결에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도 가세했다. 바흐는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이곳에서 음악적 영감을 불태웠으며 리하르트 바그너, 로베르 슈만, 펠릭스 멘델스존 역시 이곳을 둥지 삼아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들의 영향으로 라이프치히는 음악의 도시로 진화했다. 바흐 페스티벌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콘서트홀 게반트하우스는 슈케가 만든 거대한 오르간으로 유명하다.
 
바로크 음악의 정점이 묻힌 곳 Thomaskirche
1685년 아이제나흐에서 출생한 바흐는 은숟가락을 입에 물고 태어난멘델스존과는 확연히 다른 인생 항로를 겪었다. 멘델스존은 어릴 때부터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영재교육을 받았던 반면, 조실부모한 바흐에게 대학 입학은 언감생심이었다. 멘델스존이 런던, 스코틀랜드, , 나폴리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음악적 영감을 키웠던 반면, 바흐는 평생을 오르간 연주자와 궁정 악장 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음악은 그에게 재능의 발현이기에 앞서 직업이자 생계 수단이었다.
라이프치히로 건너오기 전 10년간 머물렀던 도시 쾨텐에서 바흐는 행복했다. 젊은 영주 레오폴트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6년 동안 궁정 악장으로 재직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열어갔던 그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 13곡의 칸타타, 그리고 실내악과 기악 독주곡의 대부분을 이 시절 작곡했다. 보수도 넉넉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레오폴트의 결혼과 함께 그의 인생에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음악에 무관심했던 영주의 아내는 남편이 음악에 열중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을 뿐만 아니라 바흐와의 교유를 대놓고 싫어했다. 결국 바흐는 정들었던 쾨텐 시대를 정리하고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음악감독)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1723422일의 일이다.
바흐는 1750년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토마스 교회를 위해 봉직했다. 도시의 교회음악을 총괄하는 칸토르는 몹시 바쁘고 중차대한 자리였다. 매주 토마스 교회와 인근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에서 거행되는 예배를 위해 모테트motet(중세 르네상스 시대가 전성기인 중요한 성악곡)와 칸타타cantata(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를 작곡해야 했다. 더불어 성 금요일을 위한 수난곡, 장례식을 위한 모테트, 결혼식 음악, 주문 받은 오르간 곡 등도 만들고 성 토마스 학교의 학생들도 가르쳐야 했다. 그는 빗살처럼 줄지어 늘어선 빡빡한 일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엄청난 수완과 에너지를 발휘했다. 그 유명한 <마태 수난곡>도 이때 탄생했다.
바흐의 무덤은 1950, 그러니까 바흐 서거 200주년이 되는 해에 이곳으로 옮겨져 제단 아래 묻혔다.
바흐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지 270 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주말이면 교회 제단 맞은편 2층에서 천사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젊은 멘델스존, 죽은 바흐를 불러내다
1835년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바흐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멘델스존은 184711월 숨을 거둘 때까지 천부의 음악적 감각과 기획력을 발휘,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드높이고 라이프치히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올려놓았다. 그 혁혁한 성과 중 하나가 바로 바흐의 재발견이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세간의 관심 밖에 놓여 있던 바흐의 작품을 성공적인 콘서트를 통해 무대의 전면으로 다시 불러낸 것이다.
그런데 바흐에 대한 멘델스존의 관심이 재점화된 데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숨어 있다. 어느 날 멘델스존 부부가 푸줏간에 들렀는데, 마침 주인장이 어떤 여자 손님의 주문에 맞춰 고기를 포장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순간, 멘델스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기 포장지가 바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 악보였던 것이다. 어릴 적 맹렬히 연습한 기억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소한사건은 멘델스존이 바흐를 부활시킨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세계 최고(最古)의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다섯 번째 지휘자 멘델스존은 바흐 이외에도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의 숨겨진 곡들을 새롭게 조명했다. 청중은 그의 깊은 안목과 예민한 귀, 폭넓은 식견에 탄복했고 오케스트라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재능과 환경 어느 측면에서도 모자랄 것 없는 멘델스존에게 있어 거의 유일한 불행은 너무도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그가 마지막 숨을 쉬었던 멘델스존 하우스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활동 근거지인 신 게반트하우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정원의 초록과 지붕의 빨강과 외벽의 흰색이 어울린 정경이 새뜻했다. 멘델스존 하우스는 독일 통일 이후 전 세계에서 답지한 후원금을 통해 기념관으로 복원된 경우다.
 
독일 현대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도시
라이프치히는 예술뿐만 아니라 독일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곳으로서도 가치 있는 곳이다. 그 역사는 성 토마스 교회 가까이 자리한, 고풍스러운 로마네스크 양식에 진한 세월의 흔적을 더한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시작한다. 독일 통일과 자유화에 대한 거센 움직임이 태동하던 1989. 매주 월요일 성 니콜라스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하던 이들을 중심으로 차츰 자유의식이 싹을 트게 된다. 이후 동독 정부의 감시를 피해 라이프치히와 인근 도시의 자유주의자들은 정기 기도회를 가장해 매주 월요일 성 니콜라스 교회로 모였고, 차츰 자유에 대한 열띤 토론과 갈망의 장으로 변했다. 이때가 19899. 기도회가 끝난 뒤면 어김없이 사람들은 촛불을 켠 채 행진을 시작했고, 구동독 시민 무혈 혁명의 기치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렇게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난 자유와 개혁의 움직임은 월요 촛불 시위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비밀경찰과 경찰의 폭력진압, 강제연행 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어졌다. 심지어 라이프치히 외곽을 아예 봉쇄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성직자, 노동자, 시민, 학생 등이 성 니콜라스 교회로 어김없이 모여들었다.
시위 규모는 갈수록 커져만 갔고 자유화의 열병은 구동독 지역 곳곳으로 급속히 감염돼 갔다. 성 니콜라스 교회를 막아서던 경찰과 군인마저 시위에 동참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한데, 결국 구동독의 운명이 기울대로 기울었음을 의미했던 셈이다. 혹자는 예술과 문화로 토대를 쌓아 온 도시였던 덕분에 라이프치히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곳보다 강렬했을 것이라 설명한다.
이 시위가 동독 정부의 예상과 달리 라이프치히를 넘어서서 드레스덴, 카를 마르크스 슈타트, 동베를린 등 주요도시에 까지 번지기 시작해 동독 당국의 통제 밖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동독 정부는 당황해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를 축출했다. 얼마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독일통일의 첫 시발점이 되었으니 이 변혁의 시발점이 된 시위가 처음 일어난 라이프치히가 얼마나 독일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
1 옛 증권거래소 건물 앞의 괴테 동상
2: 토마스 교회의 바흐의 무덤
3: 멘델스존 하우스


1083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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