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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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07월16일 00시00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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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4)
(2017. 6. 5 ~ 6.11 일본, 6.11-6.19 한국)
황만섭(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한때 사할린 에스토루에는 조선인 1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전쟁 후엔 5.332명뿐이었다. 피난과 자발적인 이동을 감안하더라도, 일본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죽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자착취를 위해 사할린 전체에는 약 4만 여명의 조선인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었지만, 해방 후, 한 사람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60년이 지나서야 귀향길이 열렸지만, 한국이란 존재는 이미 '낯선 조국'이 되고 말았다. 영주귀국을 바라는 1세대와 자신의 조국은 '러시아'라고 알고 있는 후손들 사이엔 이미 극복하기 힘든 골이 생겨났다. 일제패망 후 사할린 곳곳으로 끌려와 강제노역에 부역하던 조선인들은 해방이 되자, '드디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귀국선을 타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조선인을 일본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에트 정권도 이들의 귀환을 막았다. 언제는 내선일체라고 떠들던 일제가 태도를 바꾼 것이다.
 
나는 이번 일본여행기회에 우리가 그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쓰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독자들도 필자와 함께 우리의 역사를 정리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 이야기는 해남의 옥매광산이다. 일본으로 강제징용 되었다가 동원된 조선인들이 옥매광산에서 하루12시간의 노동과 굶주림 속에 군수물자로 쓰이는 명반 석을 캤고, 그들은 다시 제주도로 차출되었다가, 해방 후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타게(225명 승선)되었지만, 배에선 알 수 없는 불이 일어났고, 일제는 일본사람들만 구조하고, 나머지 조선인들은 물속에 그대로 수장시켜버렸다. 지금도 그 가족들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체 슬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 옥매광산에는 안내표지판 하나 없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는지 알지 못하고 지나친다. 옥매광산은 전남 해남군 문내면과 황산면의 경계에 있고, 앞 바다가 명량해전의 무대로, 옥매산에서 내려다 보면 울돌목, 피섬, 삼지원, 진도벽파진 그리고 어란진 등이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사람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였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의 증언은 문옥주 할머니였다. 그리고 18초 분량의 한국인 위안부 모습이 담긴 흑백영상을 서울대 정진성 교수 팀이 입수해 발표하기도 해 세상에 알려졌다. 박근혜 정부는 돈 몇 푼을 받고 불가역적으로 약속해버려 피해당사자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일본정부는 오리발을 내밀면서 위안부 이야기는 그만하라고 떠들고 있다. 소녀상을 세계 곳곳에 새우고 있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자랑스럽고, 그럴 때마다 일본인들의 심한 방해공작은 치사하고 더럽다. 지금 인천에는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 건립을 앞두고 있다.
 
당시 일제의 중국진출의 전초기지로 조병창 등 무기와 군수물자를 인천에 있는 군수공장(97)에서 공급했다. 철도, 건설 등 각종자재 공급도 인천이다.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만 2만 명이었다. 동상건립에 필요한 일억 원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에 나섰다. 현재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25여 개의 단체와 개인 600여명이 참여해 8천 만원을 모금했다는 소식(김영우)이다.
 
경기도 안산 앞바다에 있는 선감도는 일제가 어린아이들을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시설이다. 그 패악은 군사독재(1970)시절에도 똑같이 저질로졌다. 이곳 저곳에서 애들을 잡아다가 모진 육체노동을 시키면서 몽둥이로 때렸고, 숨을 거두면 아무렇게나 땅에 묻었다. 이 섬은 인권유린의 땅이자 지옥의 땅이었다. "선감학원은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부랑아 감화시설로 설립되었다. 부랑아들을 보호 육성하여 사회에 복귀시키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태평양전쟁에 인적자원을 충원하기 위한 훈육기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선감도의 이야기는 소년들의 비극이다. 선감학원은 물위에 떠있는 소년강제수용소였다. 이걸 짓느라 일제는 땅을 사들이고 주민들을 섬 밖으로 쫓아냈다. 일제시대였던 194262, <매일신보>에 게재된 '자취 감춘 부랑아 선감도에 200명 수용'이란 기사가 있다. "경기도에서는 29일 오전 4시 부내 각 경찰서의 경찰들을 총동원해 일제히 관내에 산재해 있는 부랑소년(?) 300여 명을 영등포역전에 모이게 했고, 그 중 7세로부터 14세까지 200여 명을 버스 6대에 분승시켜 오전 11시경 인천을 거쳐 선감도로 보냈다. 19423, 일제는 조선소년령을 제정했고 529일 선감학원을 설립했다. 이렇게 법을 만들어서, 수용소 문을 열었고, 아이들을 끌어오기까지 약 3개월이 걸렸다. 이제 선감학원은 소년창고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이 시설은 계속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후엔 미군 주둔지로 41개 동의 건물이 신축되었고, 미군이 철수하자 더 큰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이 만들어졌다. 1960년부터~1970년대 내내 정부에 의해 강도 높게 진행된 부랑아 단속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혹은 성과경쟁에 앞서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는 소년들을 무차별 잡아다 선감학원으로 보냈다. 선감학원에 수용된 소년들은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노동력착취, 심한 폭력 등 인권유린을 당했으며, 많은 소년들이 생명을 잃었다. 수용소 당국은 사망한 소년들을 적합한 절차 없이 암매장했다. 군사독재정권시절에 시청공무원과 경찰들이 소년들을 납치하다시피 잡아다가 선감학원에 보냈다. 그런 사실들이 국가기록원에 문서로 남아있다. 문서에 있는 '선감학원 운영대책' '별첨자료''수용아동현황(1982715일 기준)'엔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선감학원'입원 누계 5775, 퇴원 누계 5694, 현원 65'이라고 적혀있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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