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독일의 6대 가도를 가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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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07월09일 00시00분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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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6대 가도를 가다 (13)
괴테가도(Goethe Strasse) ⑦

괴테와 바이마르
 
애송이의 위대한 만남
당시 독일은 중앙집권국가이던 프랑스와는 달리 수십 개의 영방(領邦)으로 나뉘어진 상태였고, 바이마르는 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주민이 6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시였던 것. 그런데 누구보다도 포부가 컸던 26살의 청년 괴테가 이런 바이마르를 찾았다. 바이마르 공국의 최고지도자 아우구스트(Karl August·17571828) 공의 초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당시 바이마르가 처한 상황이나 그곳으로 가는 교통사정 등을 감안할 때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우구스트는 명색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하 공국의 군주이긴 했으나 실은 18살의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트가 이미 1년 전부터 괴테를 만나려고 프랑크푸르트까지 찾아와 그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안다면 그의 사람 보는 눈만큼은 대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아우구스트는 제대로 된 인재 한 사람만 있으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예상대로 괴테와의 만남은 바이마르를 유럽 문화 중심축의 하나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서양 문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 됐다. 10대와 20대 두 애송이의 신선한 만남이 세계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괴테 개인에게도 일생 일대의 전기가 됐다.
 
괴테도 처음엔 바이마르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 얼마간 머물다 고향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와 친분이 깊어지고, 계속해서 은()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 궁정극장 책임자라는 요직을 두루 맡게 되자 도저히 그의 청을 뿌리치고 떠날 수 없게 됐다. 그는 몇 차례의 여행기간을 제외하고는 83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무려 58년 동안 이 도시에서 살았다. 그는 바이마르를 처음 찾았을 때의 사정을 그의 조수이자 절친한 동료인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들려준 바 있는데, 에커만이 정리한 괴테와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바이마르에 왔을 때 그(아우구스트)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그때 벌써 큰 나무가 될 눈과 싹이 보였다. 그는 이내 나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됐으며 내가 하려는 일이면 무조건, 그리고 철저히 참여했다. 내가 그보다 여덟 살 위라는 사실이 우리의 관계에 도움이 됐다. 그는 저녁 내내 내 옆에 앉아서 예술과 자연,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좋은 것들에 대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자주 밤늦게까지 앉아 있었다. 내 소파에서 둘이 나란히 잠든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고급 포도주와 같았다. 아직도 강력하게 발효하고 있는.”
 
괴테는 당시 두서너 편의 문학작품을 써 유명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어설펐고, 무엇보다도 궁정 예법에 서툴렀다. 바이마르 상류계층 인사들은 그런 괴테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와 가까이 하기도 꺼려했다. 그런데 최고지도자인 아우구스트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젊은이를 총애하였으니 젊은 괴테의 처지는 더욱더 곤궁할 수 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트의 귀에도 비난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헤쳐 나갔다.
 
나는,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자신의 양심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기 위해서 일한다.”
 
아우구스트가 이렇듯 커다란 비전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은 어머니 안나 아말리아(Anna Amalia·1739~1807) 대공비(大公妃)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극한 정성에 힘입은 바 컸다. 그녀는 남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일찍 여의고 어린 큰아들 대신 섭정할 때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셰익스피어의 전작을 독일어로 번역한 소설가 빌란트를 가정교사로 초빙하는 등 갖은 뒷바라지를 다했다. 또한 바이마르를 당대의 문화도시인 파리나 런던과 같은 도시로 만들고자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을 불러들였다.
 
덕분에 아우구스트는 어머니보다 예술에 더 심취했다. 그 결과 전도양양한 젊은 괴테를 바이마르로 모셔왔고, 독일 최초의 오페라극장이 세워지고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연주 활동을 하는 등 문화 인프라를 지닌 바이마르를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했다. 독일 지성의 허브(hub)를 구축한 것이다.
 
괴테와 실러와의 만남
군도(群盜)’를 발표하여 제법 이름을 날린 실러가 세 명의 바이마르 거장을 만나기 위해 바이마르를 찾은 것은 1787년이다. 그가 말한 세 명의 거장은 빌란트와 헤르더, 그리고 괴테였는데, 10살 연상의 괴테는 마침 이탈리아 여행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둘이 만난 것은 그 이듬해였지만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라 가까워지는 데는 실패했다. 괴테는 기존 질서와 권위, 인습과 같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구가하겠다는 질풍노도를 청산했으나 실러는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던 탓이다.
 
이런 그들이 서로 의기투합해 우정 어린 교제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794년부터다. 실러는 그후 바이마르의 이 집에서 윌리엄 텔을 완성했고 괴테는 실러의 격려에 힘입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헤르만과 도로테아등을 집필하는 등 고전주의 운동에 진력했다.
 
괴테는 자연과 경험을 중시하는 자칭 완고한 리얼리스트였기에 이념에 매달리는 철학적 사변이 창작에 해가 된다고 믿었다. 실러의 미학 이론을 빌려 말하면 괴테는 소박한 문학, 자신은 감상적 문학을 추구했다. 괴테가 현실 그대로를 바라본다면, 실러는 이상세계를 바라본다. 바라보는 세계가 다른 두 사람, 괴테의 표현대로 대척적인 정신들은 서로를 인정했기에 벗이 되었고,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똑같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면서 세계문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괴테는 실러와의 만남을 행운의 사건이라고 말했다. <크세니엔>이라는 시집을 공동 집필하고, 문학적 동지로 평생을 함께한 두 사람. 1799년에 실러는 예나대학의 교수직을 포기하고 바이마르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괴테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10여년간 공동작업을 벌이던 실러가 1805년 세상을 떠나자 괴테는 잠시 실의에 빠지는 듯했으나 1808년에 들어 필생의 역작인 파우스트1부를 세상에 내놓았다. 1825년엔 시청에서 바이마르 거주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고, 3년 뒤에는 평생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칼 아우구스트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1831년엔 드디어 파우스트2부를 마무리해 대작을 완성했으나 이듬해 봄, 그 자신도 영원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삶의 길은 차이가 많다. 나이 어린 실러보다 괴테는 20여 년을 더 살았다. 괴테는 부유한 생활에 장수를 누린 영화와 부귀를 모두 가졌지만, 실러는 의식주의 해결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우정을 나누는 기간을 괴테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다해 실러를 도와주려 애썼다. 바이마르로 초청하여 집이 없는 그에게 임시로 자신의 집을 빌려주고, 집을 장만 하는데도 많이 도와주었다. 창작활동에 도움을 준 것은 물론, 생활비에도 세세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실러는 10년 하였음에도 둘의 우정은 끝까지 잘 지켜졌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병약해, 괴테는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병중의 처지에도 실러의 문병을 다녔고, 병상에서 친구인 실러의 부음을 들으면서는 말도 못 이은 체 통곡한 괴테였다.
 
40년 가까이 지속된 독일 고전주의를 키워낸 괴테와 실러는 일름 공원 근처의 바이마르 역사묘지에 잠들어 있다. 태어난 고향 땅이 아니라 생의 많은 시간을 보낸 그곳에 묻힌 것이다.
 
바이마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괴테와 실러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곤 했던 궁정극장(지금의 국립극장) 앞 광장에 두 사람의 동상을 세웠다. 서로 손을 잡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상이 시내 한가운데 있어 방문객은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바이마르를 방문하는 독자들은 괴테 하우스와 실러하우스를 방문하기를 권한다.
괴테하우스는 괴테가 만년에 20년가량 생활한 바로크 양식의 주거지. 1707~1709년에 세워졌고, 괴테가 거주하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개조되었다. 실내에 원래 있던 가구가 여러 개 방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는 등 기념관으로서 당시 모습이 보존되어 있다.
실러 하우스는 1777년에 지어진 단순한 후기 바로크 양식 주택으로, 16세기에 만들어진 별채의 일부(조폐국)를 포함한다. 1799년에 바이마르로 이주해 온 실러는 1802년부터 이 집에서 거주하였다. 현재는 기념관이며, 방에는 대부분 실러의 생전과 같도록 가구를 비치하였다.
 

괴테의 여인들
괴테의 곁에는 늘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파트너가 바뀌긴 했지만. 물론 그 선택권은 어디까지나 괴테의 몫이었다. 그를 서정시인으로 만든 슈트라스부르크의 프리데리케로부터 계산하면 모두 9명에 이른다.
 
약혼까지 했으나 결혼에는 성공하지 못한 16살의 아름다운 처녀 릴르, 릴르와 헤어진 다음 바이마르를 찾았다가 만난 슈타인 부인, 그녀와 10년을 사귀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그가 바이마르로 돌아온 뒤 만나 결혼에 이른 크리스티아네, 예나라는 곳에 들렸다 알게 돼 불 같은 사랑을 나눈 민나, 프랑크푸르트의 마리안네, 70대의 노년에 만나 마지막 불꽃을 태운 19세 소녀 올리나에 등이 그들이다.
 
이렇게 많은 여성 중에서 괴테의 인생과 창작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여성은 바이마르의 슈타인 부인과 그의 아내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였다. 특히 괴테가 1775년 바이마르에 도착해서 1786년 이탈리아로 떠나기까지 슈타인 부인과 나눈 사랑은 독문학사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이야기로 꼽힌다.
 
그 이유는 슈타인 부인이 한 젊은 천재 작가 괴테가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던 여성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 여성이 괴테보다 7살이나 연상인 유부녀였다는 점에서 불륜의 관계라는 측면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테가 슈타인 부인을 사랑했던 것은 이전 다른 여성들과 나누었던 풋사랑이 아니라 그녀에게 18백 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열렬하고도 온 정성을 기울였던 참사랑이었다. 따라서 슈타인 부인은 시성(詩聖)으로 추앙 받는 괴테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
1: 칼 아우구스트 공 동상 2: 국립극장 앞 광장의 괴테와 실러 동상
3: 괴테하우스 4. 실러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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