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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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07월09일 00시00분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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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 방문 일정 12일 – (3)


(2017. 6. 5 ~ 6.11 일본, 6.11-6.19 한국)

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황만섭

 

오늘은 교토 관광을 하는 날이다. 기차는 동경에서 히로시마까지 가는 신칸센으로 우리는 중간에서 내려야 한다. 500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기차요금은 1인 왕복 300유로다. 2차 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곳이 히로시마다. 관광코스에 포함되어 있는 금각사는 고려시대에 쯤에 지어졌고 청수사는 신라시대쯤 지어졌다는 설명이다. 토호쿠시 가모가와() 천궁은 귀무덤보다는 코무덤으로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등청정)조선인의 목을 가져와라고 했다가 번거롭다는 보고에 그럼 코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코무덤으로 불리다가 에도시대 때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코무덤은 어감이 안 좋으니,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권했다. 전승보고를 쉽게 하기 위해 코를 베어가지고 가서 그렇게 묻었던 것이다. 가이드는 일본인으로서 조선사람들에게 참 미안하다고 설명했다.

 

교토에는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택시회사가 유명하다. 언젠가 미니시리즈에 방송된 바가 있는 MK택시회사다. 일본은 신전이 많은데, 새의 신전을 들렸다. 토리()는 액막이를 해주었고, 그 고마움을 기억하기 위해 새 신전을 만든 것이다. 일주문들이 하얀, 녹색, 노랑으로 꾸며져 화려하다. 두 번 절하고 두 번 손뼉 치는 규칙이 따랐다. 소원을 빌고 나서는 1번 절하는 순서다. 토리가 메신저 역할을 해주었고, 그게 고마워 문 위마다 새가 앉아 있는 모형을 만들어 새에게 감사하는 행위다. 교토는 인구150만에 1300개의 절이 있다. 일본사람들이 믿는 신은 그 숫자가 셀 수 없이 많다.

 

교토는 대학도시이기도 하다. 오이가화 강이 흐르는 교토는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만 17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있는 곳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은 별장 또한 관광명소다. 교토 관광은 동경에서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떠나 하루 종일 구경하는 일정이다. 가이드의 설명은 계속된다. 기모노의 소매가 길고 나비혁대를 하면 아가씨이고, 혁대가 사각이고 짧으면 남편이 있는 기혼이다. 교토에는 망간탄광이 있다. 임금을 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강제징용에 끌려온 3천 여명이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서려 있는 곳이다.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서10시간 넘게 망간을 캐야 했던 조선인 중, 간신히 살아남은 고 이정호 씨는 후유증을 앓으면서도 기념관을 만들었다. “일본이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역사를 일본 땅 안에 만들어 영원히 남겨야 한다는 이정호 씨의 각오로 만든 피눈물이 서린 기념관이다.

 

교토의 가이드는 우리 둘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안내자다. 그 많은 재일교포 중, 한 사람일 거라고 믿었던 우린, 교토 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내 나이또래의 일본여자를 보고 놀랐다. 그녀는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해왔다. 어떻게 그렇게나 한국말을 잘하느냐? 고 물었더니 대학에서 공부도 못했고, 전공을 택해야 했었는데 적당하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면서 당시 조선어는 인기가 없었고, “정원미달로 아무도 지원자가 없었기 때문에 입학이 쉬워서 들어가게 되었는데, 공부를 하고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면서, “한국도 여러 번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일제36년을 생각하면 항상 미안한 마음이라고 했다.

 

일본화폐 만 엔에 나오는 후꾸자와 유키치는 유럽을 처음 본 후에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있었구나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보내 열심히 보고 배우게 해 새롭게 만들었다. 그게 일본의 명치유신이다. 서양문물을 보고 깨우쳤고, 또 갈고 닦아 실력을 쌓은 후에. 일본도()를 차고 말을 탄 일본 헌병과 경찰을 앞세우고, 포르투갈제 총을 들고 들어와 우리를 위협했다. 죽창과 곡괭이, 낫으로 맞섰던 농민군은 그 상대가 안 되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50년 먼저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고, 우린 그때 풀뿌리, 나무뿌리를 캐먹으며 가난과 싸워야 했다. 철종(강화도령)이 왕으로 있었고 당파싸움,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이 조선팔도에 넘쳐났다. 가난에 시달렸던 백성은 첫 농민항쟁이 1862년 봄 진주에서 일어났고, 그 한 해에만 전국 71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걸 통틀어서 임술농민항쟁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학정과 가난은 수년간 계속되었고, 좋아질 기미가 어디를 봐도 보이지 않자, 보다 못한 농민들이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친일파들은 오랫동안 동학난이라고 가르쳤고, 얼마 전에야 동학혁명이라고 격을 높였으며, 이제야 종로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세운다니 늦었지만 반갑기 그지없다.

 

농민군이 일어나자 급한 정부군은 청군을 불렀고 요청하지도 않은 일본군도 들어왔다. 전주화약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양국 군을 나가달라고 했지만, 일본이 야욕을 채우기 위해 버티면서 현대사의 불행이 시작된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725일부터 1895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그 뒤에 있었던 러일전쟁(1904-1905)에서 일본에 패한 러시아는 꼬리를 내렸다. 러일전쟁 때부터 일본은 독도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일본인 수산업자 오자부로는 독도에 살던 4만에서~5만 마리의 강치(물개)를 멸종시켰다. 강치는 고기, 기름, 가죽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뒤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가 1905년에 비밀리에 맺은 게 카쓰라 태프트 조약이다. 이 조약에는 필리핀은 미국이 먹고, 한국은 일본이 먹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미친놈들이 지들 맘대로 맺었던 도둑질 계약서인 셈이다. 이 조약은 1924까지 극비에 부쳐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전봉준 장군은 죽으면서 절명시 하나를 남겼다. 그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민을 사랑하고 의를 바로 세움에 나는 아무 잘못이 없건만,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주리. (우리의 녹두장군은 그렇게 죽었다)

*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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