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독일의 6대 가도를 가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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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05월07일 00시00분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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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6대 가도를 가다 (9)
괴테가도(Goethe Strasse) ②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 독일을 대표하는 6대 가도에 그의 이름이 빠질 리 없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약 600구간에 풀다, 아이제나흐, 바이마르, 예나, 라이프치히 등과 같은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있는데 몇몇 도시가 괴테와 깊은 관련이 있어 괴테 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괴테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 산실인 괴테 하우스는 프랑크푸르트에 자리잡고 있다.
 
괴테하우스는 영국을 찾는 여행자들이 셰익스피어 생가를 가보고 싶어하듯 독일을 찾아온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명소. 괴테와 관련된 여러 유물 말고도 1700년대 독일 상류층 주택구조와 생활용품을 함께 볼 수 있는 꽤 흥미로운 곳이다.
 
괴테가 대학 시절을 보낸 라이프치히와 함께 바이마르도 괴테와 인연이 깊은 도시다. 괴테 생애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도시가 바이마르고, 생을 마감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괴테가도를 따라 그의 삶의 흔적이 남은 도시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m Main)
제국의 도시, 근대독일의 탄생지
지난 호에는 중세시기 신성로마제국 황젱의 선출과 대관식이 이루어진 제국의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는 근대독일의 출발지로서의 프랑크푸르트를 살펴보도록 한다.
 
많게는 300여개, 적어도 30여개의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이 오늘날과 같은 근대 국가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후,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재상이 선포한 독일제국을 그 기원으로 삼는 견해가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가의 상징이 되는 국기와 헌법, 그리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이 확립된 것은 1848518일 프랑크푸르트의 파울교회(Paulskirche)에서 열린 국민회의 (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였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촉매제로 독일에서도 3월 혁명이 일어나 통일 국가 형성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 이에 독일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의회가 구성되어 1948518일 독일 전역 각 제후국들의 대의원들 800여명이 프랑크푸르트 파울교회에 모여 독일 시민국가 형성을 논의하게 된다. 비록 1년 뒤인 1949628 큰 성과 없이 해산되었으나, 이 국민회의에서 근대 독일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결정들이 이루어진다. 국민회의에서는 현재 독일 국기인 3색기(검정, 빨강, 황금색) 및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또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주의가 채택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2차대전 이후, 프랑크푸르트국민회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폭격 맞은 파울교회를 재건하고, 1948518일 국민의회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으며, 1년 뒤인 1949년 제 1회 국제도서전을 개최,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도서전과 함께 1950년부터는 세계 평화를 위한 평화상을 제정, 오늘날까지 도서전과 함께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이렇듯 프랑크푸르트는 중세 천년동안 제국의 도시로, 그리고 근대 독일의 탄생지로서의 의미를 지나고, 이와 더불어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교향으로서 그 위용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프랑크푸르트 방문객들은, 뢰머광장, 프랑크푸르트 돔, 파울교회, 괴테생가는 꼭 둘러보아야 할 장소이다. 다행이도 이곳들은 뢰머광장 중심으로 반경 100m 정도에 소재하고 있다.
 
베츨라(Wetzlar) , 베르테르와 샤롯데의 운명의 도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 괴테가 1774년에 쓴 서간체 형식의 소설로, 괴테가 그의 천재적 열정을 잘 발휘했던 질풍노도기의 대표작이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인 베르테르는 여 주인공인 샤롯테(이하 로테로 칭함)를 몹시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실의와 번민에 빠져 괴로워하다 결국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
 
불과 14일만에 끝낸 이 작품으로 괴테는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당시 소설을 읽고 감동한 젊은이들은 베르테르가 입었던 파란색 연미복에 노란색 조끼를 즐겨 입고 다녔다. 또 실연이나 우울증에 빠진 수많은 사람이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며 베르테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배경지인 베츨라(Wetzlar) 마을은 고풍스럽고 우아하다.
 
독일 중부 도시 헤센주에 있는 베츨라(Wetzlar)는 인구 5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베츨라는 제국(帝國)대법원이 있던 곳이며 헤센주의 대학 도시이기도 하다. 정작 베츨라가 유명해진 것은 대문호 괴테의 문학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베츨라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초상처럼 생각하며 읽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실제 배경지이다. 베츨라 거리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아직도 돌아다닐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마음의 지문을 남겨놓는다.
 
인구 5만 명의 베츨라 구시가지에는 괴테를 기념하는 거리와 로테 거리, 기념관 등이 있다. 로테 거리 8번지에 있는 로테의 집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인쇄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초판본과 세계 각국에서 출판된 번역본이 전시되어 있다. 콘 마르크트 광장 7번지에는 괴테가 머물렀던 집이 남아 있다. 로테의 집에서 괴테가 머물던 집까지는 걸어서 2분 거리다. 지금은 술집으로 변한 건물의 외벽에는 요한 볼프강 괴테가 1772년 여름 여기서 살았고 1977년 건물을 보수했다는 기념판이 붙어 있다.
 
여기로부터 돌바닥이 촘촘하게 깔린 비스듬한 언덕길 위로 베츨라 광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마을 수호신처럼 서 있는 대성당이 눈에 띄는데. 대성당은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시대의 사상과 문화 양식들이 성당 안에 모두 녹아 있다. 다양한 양식이 모였어도 대성당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당 안에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도들이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의자를 독특하게 배열해 놓았다. 양쪽 끝에 가톨릭과 개신교 기단이 있고, 중앙에 의자들은 등받이를 양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앉아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모양새다. 정문 위 조각상에는 악마가 돈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을 감싸 안고 있고 그들을 발밑에 두고 있는 성모마리아 상이 보인다.
 
비스듬한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은 화려한 바로크식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 서 있다. 베이지 색깔의 기본 벽 바탕에 나무 무늬 모양으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때로는 대각선으로 짙은 빨간 프레임들이 눈에 뛴다.
 
괴테와 로테의 운명적 만남
실존 인물이었던 로테가 살던 집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박물관은 로테 일가족이 살던 자취가 생생히 보존되어 방문객들을 맞는다, 이 집은 1285년 지어졌으며 튜튼 독일 기사단이 머물면서 이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관장하는 집이었다고 한다.
 
베츨라 지역에는 법원이 다수 있어, 그 당시 많은 법조계 젊은이들이 법조 경력을 쌓고 싶어서 이 마을에 이주했다. 괴테도 제국대법원에서 법관시보로 일하며 베츨라에 몇 달을 묵었다. 어느 날 괴테는 로테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로테가 살았던 집의 현관문을 열자마자 좁은 현관에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중간 턱이 있는데, 보통 손님이 오면 중간 계단 턱에서 손님을 맞이한다고 한다.
 
계단 앞에 좁은 공간 로비 벽에는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아이들을 돌보는 처녀와 뒤편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있는 조그만 그림이다.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여인이 로테이고 문에 서 있는 남자는 괴테다.
 
1772년 괴테가 처음으로 로테의 집을 방문했을 때 12명의 자녀가 그 집에 살고 있었고, 샤를로테는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그해 여름 괴테와 샤를로테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괴테는 샤를로테를 친구가 아니라 여인으로 느꼈고 샤를로테는 괴테에게 친구 이상은 아니라고 했다. 괴테는 실연의 상처를 안고 베츨라를 떠났다. 얼마 후 그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갔을 때 베츨라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베츨라에 있던 친구가 샤를로테를 사랑하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괴테는 충격을 받고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서 체질에 맞지 않는 변호사를 때려치우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자신의 실제 경험에 친구의 죽음을 연결해 써낸 작품이 바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당시 소설을 읽고 감동한 젊은이들은 베르테르가 입었던 파란색 연미복에 노란색 조끼를 즐겨 입고 다녔다. 또 실연이나 우울증에 빠진 수많은 사람이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며 베르테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박물관에는 손잡이가 호두나무로 된 구경 7권총이 전시돼 있다. 이 권총이 실제로 괴테의 친구가 자살할 때 썼던 것이다. 자살에 쓰인 영국제 권총은 1750년 제조된 것으로 요한 크리스티안 케스트너가 갖고 있던 호신용 권총이었다. 얄궂게도 케스트너는 샤를로테의 약혼자였다.
 
이 소설은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왕족이나 귀족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사서 읽었다. 당시 25세의 젊은 작가 괴테는 이 소설 하나로 유명해졌다.
 
나폴레옹은 전쟁터에도 이 책을 가지고 다녔으며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과 괴테는 직접 만나 소설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이 책은 근대화 시대 동아시아에 소개됐을 때 신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던진 작품이기도 하다.
 
베르테르와 샤롯데의 도시 베츨라는 잘 알려진 관광지는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꼭 가볼만한 도시이다.
사진1: Paulskirche
사진2: 괴테 생가
사진3: 베츨라 시내
사진 4: 로테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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