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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06월19일 00시00분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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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안달루시아(Andalucia) 8일 여행 – (6)
황만섭(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2017. 1. 22 ~ 1.29)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23년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때 카르타고는 사르데나 섬과 시칠리아 섬을 로마에 빼앗겼다. 당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반도의 절반(포르투갈 절반, 스페인 절반 정도의 땅)과 지중해를 낀 아프리카 상단의 땅들, 즉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일부까지 길게 늘어진 방대한 땅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그러니까 우린 지금 2천년 전에 카르타고 땅이었던 곳을 여행하고 있는 중이다.
 
2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16년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전쟁이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과 로마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한니발 전쟁으로도 부르는 그 전쟁에서 로마의 공화정은 알프스산맥을 넘어온 명장 한니발에 밀려 이탈리아 본토까지 공격 당했으나, 역전에 성공하여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뒤 또 한번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46)3년간 치른 후, ‘카르타고는 세계지도에서 사라졌고, 로마가 이베리아반도의 새 주인이 되었다.
 
이슬람인들은 그라나다에 수도망을 건설했고, 무어인들은 대학을 세웠으며, 유대인들과 무어인들은 의학, 약학, 철학, 수학을 발달시켜 그라나다를 빛냈다. 시내구경은 이사벨 여왕의 동상과 여왕이 살았던 왕궁, 대성당, 시청 등 가이드가 몇 가지 설명을 해주며 자유시간에 알아서 원하는 곳을 구경하라며 자유시간을 주었다. 하루 동안에 모든 걸 다 볼 수는 없는 일이니, 취향대로 구경하도록 자유시간을 주는 것은 잘한 일이며, 또 실제로 시간이 많아 직접 안내하면서 여기저기 끌고 다녀도 귀찮아서 따라다닐 마음도 없었다. 이젠 지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자유시간이 그리운 찰나였다. 다리도 아프고 어디 가서 편히 앉아 시원한 맥주나 한잔 마셨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했다.
 
자유시간에 시내를 돌다가 우연히 시내중심가의 골목길을 걸었다. 그게 유명한 알까이세리아칼데레리아라는 골목길이었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빼놓을 수 없는 명소였다. 다만 대성당을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은 지금도 미련으로 남는다.
 
우리 일행 여섯 명은 원만한 여행 진행을 위해 공금을 만들었고, 훌륭한 수학자를 재무로 모셨다. 그리곤 돈을 물 쓰듯이 써댔다. 자기 돈이 직접 자신의 주머니에서 그때그때 나가면 속으로 계산이라도 하면서 쓰게 되니까 지출이 적었을 건데, 공동지갑이라서 의사를 물어 지출하다 보니 씀씀이가 헤펐다. 서로 여유로운 척, 넉넉한 척 하면서 동의하다 보니 지출이 손쉽게 이루어졌다. 눈치를 챈 재무가 오늘 점심은 긴축정책을 썼다. 여섯 명이 점심을 먹었는데 싸구려 피자집에서 23유로로 거뜬히 해결해버린다.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 이번 여행엔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었고, 저녁식사도 추가로 지불한 상태여서 점심만 매식하면 된다. 호텔에서 먹는 조식과 석식은 엄청나게 좋았고, 이것 저것 맛만 본다고 해도 배가 남산만큼 올라올 지경이었다. 점심 한끼 정도는 안 먹어도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들은 꼬박꼬박 챙겨먹는 습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는다. 자연스럽게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노력해서 친구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살다 보면,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에 안 드는데, 남이 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옛말에 일생 동안 좋은 친구 두세 사람만 가져도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까지 생겨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좋은 친구 두세 명 정도는 사귀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친구가 좋다고 너무 많이 가져도 그것 또한 문제다. 너무 많은 친구들과 즐겁고 재미있게 어울리다 보면, 자기 시간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맞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으로 직결된다.
 
그러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속속히 알려면 여러 측면에서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살펴야 한다. 그래서 세속에 돌아다니는 말에 같이 고스톱을 쳐보던가, 여행을 같이 해보면 상대의 성격을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같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고, 시간이 맞아야 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 데 고집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상대를 아껴야 하는 철학이 필요하다. 어쩌면 늘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해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스페인 여행에서는 피카소와 콜럼버스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콜럼버스의 인도 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카리브해를 한 때 서인도 제도라고 불렀던 시절이 있었다. 거기에는 다분히 아메리카 원주민을 경멸하기 위한 목적이 들어 있다. 콜럼버스를 아메리카를 발견한 위인으로 대접하지만, 사실은 이 사람이 진짜 위인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가는 논쟁이 필요하다. 그는 원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고, 노예로 팔아 치웠으며, 각종 재물을 약탈해 간 인간쓰레기, 천하의 망나니, 희대의 학살자일뿐이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위인전에서는 그의 순수한 목적이 탐험이었다고 말하지만, 그의 1차 원정의 진정한 목적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는 순진무구한 '인디언'들을 접하면서 원주민들이 가지고 다니는 금에만 관심을 보였다. 문제의 2차 원정에서부터 콜럼버스의 탐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그는 1차 원정에서 돌아올 때 선원 30명 가량을 아이티에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다음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금을 받아냈다.
 
그가 막상 2차 원정으로 다시 아이티로 돌아와 보니, 일전에 남겨놓은 30명 가량의 선원들은 병으로 죽거나 원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원들 한 사람당 최고 5명 정도의 원주민 여자들을 거느렸고, 금을 찾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갖은 행패를 다 부렸던 것이다. 이후, 콜럼버스는 안전을 위해서 호전적인 부족뿐만 아니라, 보통 원주민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인정사정없이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으며, 3- 4차 원정이 계속되면서 콜럼버스의 후계자들은 점점 더 잔인해졌다.
 
마스티프라라고 하는 맹수사냥용 초대형 견()을 데리고 다니며 원주민을 학살했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았으며,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콜럼버스가 제시하는 할당량의 금을 채우지 못할 경우 손을 자르는 형벌을 가해 과다출혈로 죽어갔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30만명이었던 아이티 섬의 인구는 2년만에 10만 명이 죽었고 나중에는 결국 500명밖에 살아남지 않는다. 처음에는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나중엔 역으로 흑인노예들을 수입해 왔지만, 흑인노예들도 원주민 노예들처럼 얼마 안 가서 똑 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다음은 이야기는 피카소다. 피카소는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리고 그 모든 여인들을 다 버렸다. 딱 한 여자가 피카소를 버렸을 뿐이다. 그 여자는 프랑스와즈 질로였다. 피카소는 대다수 여자들에게 숭배를 받으면서 그가 먼저 찼지만, 차인 적이 없었던 피카소가 질로의 이별통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질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달래며 애원했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겠다고 협박 했지만, 끝내 질로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질로는 피카소와 이별 후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 이라는 책을 발표해 피카소와 함께 살았던 10년간의 생활을 고백했다. 피카소의 마초적인 성격과 여성편력까지도 자세하게 쓰면서, “나는 나의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았는데, 나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라고 고백했다.
 
피카소의 여성편력 또한 자신의 그림만큼이나 요란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고, 여자들과 연애를 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나이 60에도 70이 넘어서도 20살 갓 넘은 여자들과 살림을 차려 자식을 낳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심각하게 나쁜 남자였다. 여자에게 접근할 때 "당신을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라는 말로 접근했고, 이 말에 거개의 여자들은 힘없이 넘어갔다. 피카소가 92세로 눈을 감자, 그를 따라 죽은 여자까지 생겨났다.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www.segye.de에서 다른 글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2: 그라나다 전경
사진3: 알까이세리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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