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 음악 이야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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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01월09일 00시00분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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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19)
황만섭(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Lois Hector Berlioz 1803-1869)는 후기 낭만주의 프랑스 작곡가다. 피아노가 없었던 가난한 마을 출생의 베를리오즈는 13세 때 교사한테서 플루트를 배웠다. 이어서 종적(縱笛), 기타 3가지 악기는 우여곡절 끝에 통달하게 되었으나, 피아노는 배울 기회가 없어, 끝내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작곡가가 되고 말았다. 작곡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집에 피아노를 두었으나 화음을 짚어 볼 때만 사용했다. 그가 1830년에 발표한 환상 교향곡"표제 음악"이라는 관현악곡의 새로운 극적인 스타일을 창시했다.
 
그는 특별한 음악가 가문의 출신도 아니었고, 특별히 음악교육을 받지도 못했던 사람이다. 아버지는 그를 의사로 키우고 싶었지만, 그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다. 베를리오즈는 음악원 시절에 악기의 표현력에 관심을 가졌고, 음색의 효과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그런 문제로 인해 교수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으며,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늘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를 보였던 사람이다. 그가 당시 파리 음악원장 루이지 케루비니와 벌인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회자된다.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주장한 베를리오즈는 문학과 음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곡활동을 펼쳤다. 당시에는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들을 후기 현악사중주에 맞추어 연구하기도 했으며, 특히 음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악기사용법을 연구했고. 그가 작성한 악기사용법은 훗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의해 증보되어 오늘날까지 이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파리에서 음악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적들을 만들어 냈지만,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후기 낭만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프랑스 음악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죽고 난 후의 일이다.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가 1826년을 전후로 하여 음악을 준비하는 시기였다면, 1830년대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던 시기에 해당된다. 1830년 로마의 콩쿠르에서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대상을 받는다. 베를리오즈는 18279,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영국 극단이 공연하는 셰익스피어의 <헴릿>을 관람하던 중, 오필리아 역의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을 보고 자신의 가슴속에 짝사랑의 불을 지폈다. 이름도 없었던 일개 가난한 작곡가가 당시 명성이 절정에 달했던 여배우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많은 편지를 세 살이나 연상인 해리엇에게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나는 파리의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오필리아의 여배우를 생각하면서 그 여자의 빛나는 영광과 나의 초라한 무명을 비교해 보았다. 그래서 마침내 일어섰다. 그 여자에게 아직 알려있지 않은 내 이름을 빛나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그의 자서전에 고백한 내용이다.
 
자신의 아픈 마음을 세밀하게 묘사해 교향곡에 담아 대중 앞에서 연주함으로써 실연의 비참함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그것만이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1829(26) 봄에 작곡에 들어가, 이듬해 4월에 완성시킨 곡이 <환상 교향곡>이다. 심리적 표제 음악으로 한 예술가의 생활 에피소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젊은 예술가가 실연 끝에 아편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양이 적어서 죽지 않고 호수 속에서 꿈을 꾼다는 내용이다.
 
그 꿈속에서 감정과 환상은 모두 음악적인 곡상(曲想 )이 되며, 특히 사랑하는 여인의 영상은 고정된 선율로 전 악장에 깔려있다. 선율이 주인공이고 작곡가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하나의 선율이었던 셈이다. 작곡가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체험을 심포니 형식으로 하여 자전적으로 쓴 곡이다.
 
<환상 교향곡>이 해리엇의 주의를 끌지 못한 채 베를리오즈는 마리 모크와 약혼을 했고 로마로 유학을 떠나지만, 모크와의 약혼은 깨어졌고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18개월 만에 귀국한 그는 파리 음악원에서 <환상 교향곡>의 연주회를 갖는다. 이 때 청중석엔 해리엇이 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그 때까지 베를리오즈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환상 교향곡>의 주제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 연주회를 계기로 사실 확인이 되, 두 사람의 교제가 시작되어 1833년 결혼에 성공한다. 그토록 높고 멀리 있던 거만한 꽃은 그의 복수로 결국 꺾였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곡들을 만들었고, 프랑스 작곡가로서는 예외적으로 대규모 기악곡 창작에까지 정진하였다. 마침내 프랑스 특유의 섬세한 감정과 관현악에 감미로운 음색을 즐겨 사용한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표현들은 때때로 격정적인 폭발의 정점에 도달하게 하였다. 그는 또 스스로를 베토벤의 사도로 자처하였으며, 외관은 그다지 프랑스적이지 않지만,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음의 원조법적 사용, 음의 선명한 배합, 명쾌한 선율 등은 극히 프랑스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빈곤한 생활을 보낼 때가 유난히도 자주 반복되는 고달픈 삶이었다.
 
그것은 1839년에 발표한 오페라벤베누토 첼리니가 실패하면서 오는 시련이었다.
 
1842~1843년에는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이 여행 중에 로마의 사육제 서곡을 작곡하는가 하면, 1845~1846년에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에서 공연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베를리오즈는 1846년에 일시 귀국하여 파우스트의 겁 벌를 발표하지만, 그에게 또다시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왔다. 1847년 러시아 공연 때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는 그의 조국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서두른다.
 
1850, 파리만국박람회 개최를 축하하는 공연에 그가 작곡한 테 데움이 공연되었고, 같은 해에 필하모닉 협회를 조직하여 파리에서 음악 활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 계속된 실패로 인한 경제적 궁핍과 프랑스 음악계와 마찰로 그의 일상이 고달프게 꼬여갔다. 1856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생계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다시 연주여행을 떠나지만, 1867~1868년 러시아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의 활동은 멈추었고, 1869년 지병으로 파리에서 병사한다.
 
참조 : ‘세계음가기행’(김성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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