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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事必歸正' 2014-07-12 18:41:48
작성인
최인철 조회:2660     추천:458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파괴되고 지워지고, 우리들의 의식에서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역사의 큰 틀은 우리들의 삶 속에 분명히 살아있다. 역사의 과거와 미래라는 이 우주의 영원한 시간의 물결이라는 것은 매순간 현재화 되는 그런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지금 이 한순간 순간의 현재 의식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의 과거, 그 진실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오늘 이 순간 우리 모두의 삶의 현실을 풍요롭게 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미래의 진정한 창조적 설계를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과거를 제대로 인식하는 만큼 오늘 이 순간 나의 의식은 깨어나는 것이다.
 
첫째 우리 한국사의 현주소는 일제의 식민사학과 중국의 침략사관, 중화사관에 사로잡혀 우리는 우리 국조와 시원역사를 부정하는 노예사관을 그대로 옹호하고 대변을 하고 있다.
 
둘째는 정신사가 전무하다. 지금은 서양 실증사학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을 늘 떠들어대면서 모든 역사책들이 구석기 신석기로 시작한다. 정신사가 없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자연과 인생을 바라보았는지 실제 아무것도 없다.
 
셋째는 우리의 시원역사가 터럭 하나 남기지 않고 뿌리가 뽑혀버렸다. 한국사 시원 뿌리가 말살된 5대 역사 조작극이 있는데, 중국에서 두 가지를 조작하고, 일본이 세 가지를 조작 했다.
 
 
중국인들의 역사 기록법
공자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여 <춘추春秋>로 이름 지었는데,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는데, 중국 사서의 편찬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요약된다.
 
첫째,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
둘째,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
셋째,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略外)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의 잘못된 춘추필법을 지적한 것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굳게 지키던 완유頑儒”라고 혹평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BC 156년~ BC 87년)의 사관史官 사마천의 불의
한중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동북아의 한민족 강토로 쳐들어간 한무제가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史記>를 저술하였다. 
 
사마천이 조작한 기자조선(箕子朝鮮)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예濊, 맥貊, 발發, 숙신肅愼, 우이嵎夷, 내이箂夷, 견이畎夷, 서이徐夷, 고죽孤竹, 고이高夷 등과 같은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이 등장한다. 다른 호칭을 써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 자체를 철저하게 제거한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史記>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다. 중국 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정도 가면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들판 한가운데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箕子의 묘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은 한민족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箕子는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당시 상나라의 삼현三賢이었다.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되었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다. 기자箕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箕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기자箕子에 대한 진실은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단군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단군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가 고향 서화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인물 위만(衛滿)
또 일본 사람들은 우리 조선 역사의 출발을 ‘위만조선’으로 말한다. 조선은 본래 독자적으로 나라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인 ‘위만조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위만조선이 BCE 194년부터이니까, 조선의 역사는 약 2,200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년~ BC 108년) 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단군조선은 신교문화(神敎文化)의 삼신사상(三神思想)을 바탕으로 조화신造化神, 교화신敎化神, 치화신治化神의 원리에 따라 고조선(BC 2333~ BC 238)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진한(辰韓)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은 부단군을 두어 간접 통치를 했다. 진한(홍산 적봉 일대), 마한(한반도 일대), 번한(산동반도 일대)의 삼한(三韓)을 22대 색불루(索弗婁,BC 1285~ BC 1238) 단군 때 삼조선 즉,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으로 변경하였다. 위만(BC 194)이 강탈한 땅은 번조선의 부단군 기준(箕準, BC 221~ BC 194)이 통치했던 곳이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삼조선 중,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番朝鮮: 산동성 일대)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신채호(1880∼1936) 선생은 ‘그것은 우리의 변방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천의『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1712∼1791)의『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 지금의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고 이야기한다. 천하에 불의한 위만이란 자가 번조선의 왕위를 찬탈하고 정권을 잡은 것인데, 그가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정신 나간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한 삼국유사
단군왕검이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다스리면서 21세 소태(BC 1337~ BC 1286)단군 때, 쿠테타가 일어나 1048년 동안 나라의 수도를 유지했던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44세 구물(BC 425~ BC 397)단군 때는 수도를 장당경 아사달 시대로 옮겨가면서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왕검이 1908세를 살았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의 진실은 수도 송화강 아사달 1048년 시대와 백악산 아사달 860년 시대를 합하면 이게 1908년이다.
 
단군조선은 44대 구물(BC 425~ BC 397) 단군의 대부여(大夫餘) 이후 마지막 47세 고열가(BC 295~ BC 238)단군까지가 188년이다. 그리고 대부여大夫餘는 BC 232년 해모수의 북부여北夫餘로 계승되고, 북부여는 다시 고구려(BC 58년)와 대진국(발해,AD 668년)으로 국통 맥이 이어진다.
 
 
일제에 의해 조작된 한사군漢四郡’
우리역사가 중국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역사말살의 학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사군漢四郡 대동강설’이다. 한나라 무제가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에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 개의 식민 구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어떠한가?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있었고 나머지 삼군이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고대 중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라는 사평(史評)에서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게다가 기시형을 당한 좌장군 순체는 “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인물이어서 무제가 이 전쟁 결과에 얼마나 분개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전쟁에 나갔던 장수가 승전하고 돌아오면 제후(諸侯)로 봉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제후는커녕 모두 사형 당했다. 사마천(서기전 135년~서기전 90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사마천은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고조선과 한漢나라의 전쟁이 끝난 200여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와 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춘추필법이란 미명 아래 다른 민족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서술을 해왔다. 낙랑군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데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유명한 산이다.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쓴 중국 사서는 하나도 없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군색함 자인한 이병도 황해도설’
이병도: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것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후한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대방 현령을 죽이고→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전과를 고려하면 대방은 황해도에 있을 수가 없다.
 
‘군국지’(郡國志)에서도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 대방, 낙랑이 모두 고대의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에 있다는 ‘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황해도로 비정한 주류 사학계의 정설은 설 곳을 잃는다.
 
삼국사기 “낙랑군 포로 2만명”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이란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는데, 북한의 박진욱은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하여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신의 손’을 거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이런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해석할 때 중국계 포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 대왕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 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호구 수가 기록된 낙랑 목간도 이런 경로로 획득한 문서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α’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포로들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가장 먼 평안남도나 황해도에 집단 거주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많은 망명객도 있었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년(197년) 조는 “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 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논리가 그대로 한국사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식민사학의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의 와세다대 유학 시절 스승이자 만철(滿鐵)과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 ‘고구려 유적’이 ‘한(漢)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시대 고적조사 사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친 그는 대동강변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유적들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도리이 류조가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을 ‘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封泥)를 발견하고 2000년 전에 세웠으나 그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 ‘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고 평양 일대는 낙랑군 유적이 되어갔다.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연결 고리 북부여北扶餘 단군조선(BC 2333~ BC 238)을 북부여(BC 239~ BC 58)가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 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扶餘記」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北扶餘記)」상에 해모수 단군에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BCE 108 ~ BCE 60)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 번째 인물인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司馬 遷, BC 145년~ BC 86년)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史記)]를 편찬했다.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BC 239 ~ BC195)와 주몽(BC58 ~ BC19)은 무려 13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BC59~BC58)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BC 239~ BC 58)는 47세 고열가 단군조선(BC 295~ BC 238)과 고구려(BC 58 ~ AD 668)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한무제를 물리친 후 고두막한高豆莫汗은 졸본에 나라를 열어 졸본부여라 하고,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동방 신교의 대광명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졸본부여를 동명부여라고도 한다. 바로 동명왕이 고두막한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다 왜곡되어 지금은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해우루, BC120~ BC87)가 돌아가시고 아우 해부루가 즉위하자 고두막한은 해부루를 동쪽으로 보내고 5세 단군(BCE 108~ BCE 60)으로 등극을 했다. 이로써 북부여의 후기 시대[後北夫餘]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6세 고무서 단군(BCE 59 ~ BCE 58) 때에 이르러 북부여는 막을 내린다. 한편 왕위에서 밀려난 해부루 단군은 국상 아란불과 함께 우수리강 지역의 가섭원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을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하며, 금와와 대소로 왕통이 이어졌다.
 
그러면 세상에서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고주몽은 어떤 인물인가?
그분은 고구려의 창업 시조이다. 원래 북부여의 마지막 단군인 고무서(BCE 59 ~ BCE 58)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북부여의 BCE 58년에 7세 단군이 되었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변경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668년에 망했다고 배워왔다. 그러니 고구려 역사는 기껏해야 700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신라의 고운 최치원의 글을 보면, ‘중국에서도 고구려 역사를 900년으로 알고 있더라’고 했다. 
 
광개토태황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還至十七世孫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17세世를 내려와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십팔 세(391년)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 하셨다. 고구려왕 계보에 따르면, 1세 고주몽 이래 광개토열제는 19세인데 왜 비문에는 17세손이라고 나오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환단고기]의 <삼성기 상>를 봐야 한다.
 
至癸亥春正月하야 高鄒牟가 亦以天帝之子로 繼北夫餘而興하사 復檀君舊章하시고 祠解慕漱하爲太祖하시고 始建元하사 爲多勿하시니…
계해(BCD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주몽이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시니… <삼성기 상>
 
고주몽은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를 올리며 고구려를 건국한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의 기원을 해모수로부터 잡고 있는 것이다. 북부여 해모수의 건국(BCE 239년)을 고구려의 기원으로 잡으면, 멸망 때(668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역년은 907년이 된다. 고구려가 해모수를 태조로 삼고 있기 때문에, ‘17세손’ 의 문제도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열제가 형제 상속 등을 빼고나면 고주몽의 13세손이라고 한다. 그럼 4세는 어디에서 찾는가? 4세는 해모수 단군과 고주몽의 관계에 있다. 고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단군의 현손玄孫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해모수에서 고주몽까지 4세, 고주몽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3세, 이렇게 하여 해모수에서 광개토열제까지 17세를 전한 것이다. 고구려 역년 900년이나 광개토경평안호태황비문의 ‘17세손’으로 볼 때,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단군으로부터 그 기원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역사 침략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모든 문제는 밖에 있다는 듯이 대응해왔지만 사실은 안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우리 사회 내부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식민사관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잉태한 식민사관은 일제 패망이후에도 살아남아 우리 국민들의 현재의 역사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의 적자嫡子들은 실증사학이란 외피를 입고 살아남아 현재의 한국사를 식민사학의 아류로 만들었다. 이런 아류 식민사학자들이 가장 집요하게 공격하는 부분도 역시 고조선사인데, 이는 아류 식민사학자들이 일제 식민사관, 중화 패권주의 사관과 동일한 역사 인식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일제 식민사관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한국사는 식민지 상태로 출발한 것이 된다.
 
중국 동북공정은 단군조선은 없었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만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고조선사는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된다. 단군조선을 부인하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시작한 고조선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사는 한국사라고 대응해 왔던 것은 그간 단군조선을 부인해왔던 한국 내 아류 식민사학의 말 못할 속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시조가 중국인이라는 주장에 대해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주장은 번지수가 틀린 대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솔직히 고백하고 반성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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