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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 그 어찌 잊으랴...5.26 2010-05-18 23:36:44
작성인
손길자 조회:3314     추천:458
 
» 힐셔 전 특파원은 자신이 취재한 광주 기사가 실린 1980년 5월28일치 <쉬드도이체 차이퉁> 신문을 아직도 고히 간직하고 있다. 광주를 취재하고 5월27일 서울로 올라온 그는 정보기관 감청 을 우려해, <로이터통신>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전화로 기사를 불러 송고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3일 뮌헨의 올림픽 경기장앞 아파트에서 만난 게브하르트 힐셔(75) 일간 <쉬드도이체 차이퉁> 전 극동특파원은 “만 30년 전 광주에서 목격했던 장면은 2차대전 막바지인 9살 때 독일의 어느 기차역 앞에서 본 어린이들의 주검들처럼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을 통해 광주에 관한 기사를 쓰던 힐셔 특파원이 광주를 찾은 것은 군의 강제진압 바로 전날인 1980년 5월26일이었다. 힐셔는 25일 부산을 거쳐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시민군이 장악한 ‘해방된 광주’의 마지막날을 취재했다. 그러나 그날이 마지막날인 줄은 몰랐다.

- 1980년 5월 광주를 가게동기와 취재의 어려움은 없었나? 

= 일본 도쿄에서 5월17일부터 계속해서 광주에 대한 기사를 <쉬드도이체 차이퉁>에 송고했다. 당시 도쿄는 서울보다 훨씬 빨리 사실에 가까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과 통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매일매일 기사를 송고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독일 본사와 한국취재를 의논했고, 5월 25일(일요일)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광주에는 26일 도착했다. 광주에 들어가는 너릿재 길목에서 군인들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독일여권에 직업은 써있지 않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국말로 “독일사람입니다“고 말했더니, 군인들이 “독일“이란 말을 알아듣고 나를 독일 신부쯤으로 생각해 통과시켜준 것 같다. (힐셔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다. 뱃속에서 탯줄이 오른손목에 감겨 잘려나간 채 태어났다. “아마 불구 손을 가진 사람이 기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쉽게 통과시킨 것 같다며 인생에서 불구가 항상 손해는 아니기”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검문 외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광주 가는 길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유감스럽게도 그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자 신분을 밝히고, 통역을 부탁했다. 그분은 하루종일 통역을 해주시면서 취재를 도와주었다.

- 5월 광주에서 겪은 일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기억나는 사람들은?  도청 앞에는 아마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차량이 있었다. 도청주변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갈 때 1차 계엄군 진입시도 때 죽은 신원미확인의 주검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이 있었다.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 는 60개 관이 흰색천이나 태극기에 뒤덮여 있었다.

상무관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젊은이가 관 앞에 주저앉아 “여기 내 동생이 죽어 있다. 어떻게 한국 군인이 같은 한국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 3개의 관(부모와 7살 소년)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울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몇명의 여고생들도 한 반 친구의 관 앞에서 목이 메여 울고 있었다. 한 여고생이 “17살의 앳된 우리 친구(박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절규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광주시민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고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내 기사에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는 장면을 묘사했다. 시민들의 시위와 항거가 북한의 사주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질서를 지키려 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느낌을 취재 내내 받았기 때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기사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9살 때 2차대전 막바지를 경험했는데, 그때 독일 한 도시의 기차역에 죽어 널브러져 어린이를 포함한 주검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함께 광주에서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부상자 취재를 위해 조선대학 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외국인 기자가 취재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것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광주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이렇게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폭력적 상황을 막는 길이라고 동행했던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의사와 간호사를 설득했다. 결국, 한 의사가 취재를 허락해서 중환자들이 있는 병동을 돌아볼 수 있었다. 병원에는 300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다. 총이나 총검으로 눈, 가슴, 배 등에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신장 밑부분(독일식 표현으로 성기 부분)을 다친 여성환자도 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참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시민위원회를 찾아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민위원회 대변인와 인터뷰를 했다. (힐셔는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고, 졸업생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윤상원이 아닌가’라고 묻는 질문에, 확실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도중 인상적인 점은 두 가지다. 그 때까지 161명(5월 26일 당시)의 죽음을 확인했다며,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대변인은 1달간 버틸 식량은 충분하다며 끝까지 가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두번째로는 현재 광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을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가능한 빠른 시기에 원한다고 한 것이다. 미국과의 대화를 하는 것 외에 광주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해결방법은 없다며 기자인 내가 서울로 가게 되면 이런 시민군의 의사를 미국 대사관 측에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 시민군의 입장은 내게 놀라웠다. 한편으론 당시 시민군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들이 어떻게 군인과의 대치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시민군의 부탁대로 미 대사관과 접촉했나?

= 26일 자정 가까운 시각 광주를 빠져나왔다. 27일 아침 화순의 숙박집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엄군이 다시 진입했고, 도청에 있던 모든 시민군이 사살되거나 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나와 인터뷰를 했던 대변인도 죽은 것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부탁받은 대로 미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려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내가 서울에 가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나와 인터뷰를 마친 몇 시간 뒤에 계엄군은 2차 진압에 들어갔고, 어떤 시도도 도움도 될 수 없도록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 1차 진입 때 161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광주에서 바로 몇 시간 전에 보고듣고 나왔는데, 그 몇 시간 후 아침(27일) 화순 숙박집에 들은 라디오에선 두명이 죽었다는 공식발표를 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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